
신지영

ランチの女王
平均 3.8
두서없는 심상들로 연계되는 추억이 있다. 스물 두 살 때, 지금 생각으로는 아기처럼 어리지만 학교에서는 제법 고학번 선배 취급을 받던 시절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한참을 모은 돈으로 떠나느라 남는 건 시간이고 없는 건 돈이었어서, 그리스에서 터키로의 이동 수단을 비행기 대신 배로 결정하는 데에 큰 고민은 없었다. 덕분에 정확한 날 수는 가뭇하지만 사흘 밤낮 가량을 창문도 없이 이층 침대만 두 개가 놓인 다락방 같은 곳에서 꼬박 보내야 했다. 커다란 크루즈선이었는데 제일 싼 배삯으로 얻을 수 있는 객실의 모양은 그랬다. 가끔 갑판에도 올라가고 탁 트인 선상 카페에서 아이스크림도 사먹으며 긴긴 무료한 시간을 채워보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이 배를 타며 굳힌 돈과 쉽게 사먹고 사라지는 아이스크림 값의 액수를 깐깐하게 재어보는 습관(을 가져야 했던 환경) 이 있었고 이내 내게 허락된 작고 어두운 방으로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여행 출발 전 친구에게 안 쓰는 피엠피 하나를 빌려 왔었는데, 고등학교 때 인강을 듣는 용도로 쓰다 대학생이 된 후 서랍 어딘가에서 먼지가 쌓여 가던 걸 내 부탁에 겨우 찾아냈다고 했다. 원래는 출국 전에 피엠피 안에 보고 싶던 영화를 잔뜩 넣은 다음 이렇게 긴 이동 시간 동안에 보려던 계획이었는데, 언제나 발목을 잡는 내 게으름 덕택에 결국 안에 어떤 파일이 들어 있는지 구경도 못한 채 기계만 달랑 캐리어에 넣어 출발하게 되었다. 그 피엠피 안에 들어있던 게 런치의 여왕 전편이었다. 다른 것도 너댓 종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치해, 오버스러워 를 연발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작은 침대 구석에 웅크려 드라마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내리 몰아보았다. 유치하고 오버스러운데도 다케우치 유코가 맛있어, 하고 오므라이스 한 그릇을 해치우며 지어 보이는 미소는 지켜보고 있자면 따라 웃지 않을 방도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작은 골방에서, 피엠피 화면이 암전으로 전환될 때마다 마치 유코처럼 얼굴을 활짝 열심히 다 써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치는 걸 발견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유코랑 같이 산토리니에서 로도스도 가고 페티예까지도 가고 그랬다. 그래서 다케우치 유코는 나한테 그리스고 스물 두 살의 한 시절이다. 볕 안 드는 방에서도 유코는 나에게 그리스 바다와 지중해의 바람을 선물해줬다. 한국에 온 후에도 데미그라스 소스를 얹은 오므라이스를 파는 집을 찾아다녀 보기도 하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서는 해바라기 밭의 유코를 붙잡고 같이 울기도 했다. 몇 년에 한 번쯤은 꼭 떠올리며 예의 그 미소를 여전히 짓고 있겠지, 막연한 안부를 묻던 소중한 추억의 한 자락이었다. 이제 나는 돈보다는 시간이 없어 몇 날 며칠을 배의 삼등석에서 보낼 일은 없을테고 친구에게 피엠피를 빌리기 전에 새 아이패드를 주문할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도 있으며 경양식보다는 맛있는 게 많아 오므라이스는 더이상 찾아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는 절대로 대체될 수 없을 한 추억이 영원한 빈자리로 남게 된 셈이다. 너무 큰 비극 앞에서 내 추억을 잃었다는 이야기 따위를 늘어놓고 있는 게 싫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적어두고 싶다. 고마웠다고, 그 미소 정말 많이 예뻤다고.. 아마도 전해지기는 힘들겠지만. 비가 오는 계절에 다시 들러줄 것 같은 사람, 그 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