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오세일

오세일

3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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モード家の一夜

映画 ・ 1969

平均 3.8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 속 루이라는 인물이 지닌 신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영화에서 다루는 '파스칼의 내기'가 품고 있는 정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야만 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최초로 제시한 변증법으로써,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생전에 신을 믿으면 사후에 겪게 되는 손해는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생전에 신을 믿으면 사후에 천국에 가게 되어 결국엔 옳은 선택을 하게 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에 반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생전에 신을 믿지 않으면 얻게 되는 이득은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신을 믿지 않으면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루이는 그러한 파스칼의 내기에서 비롯된 이론을 곧 본인의 삶 안에 절대적인 하나의 신념으로 정형화시킨 자이고, 그렇기에 주말마다 교회에 참석하고 여성과의 만남에 있어 주관성이 (과할 정도로)투영된 규칙을 세우는 일종의 맹신론자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그의 다분할 정도로 의도가 투명한 자아가 손실된 생활 방식은, 내면의 욕망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무언가에 대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마저 거세시키는 방향으로만 뒤틀리게 뻗어나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를 자학(부정)하면서까지 굳이 이처럼 인생의 즐거움을 옥죄어만 오는 미련한 신념을 지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추측건대, 그 이유는 루이 본인이 자기 자신을 지성인으로 생각하고(또는 되고 싶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지성인이라면 그들만의 타인을 지칭하는 용어인 자칭 '일반인'들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만 된다고 생각하기에, 루이의 신념은 모든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그렇듯 자신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분수에 맞지 않는 신념, 이론 등을 설파하며 열등감에 찌든 외관을 유식함의 껍데기에 숨기기에만 급급한 인간의 추함과도 같다. - 루이는 확률이 90%인 A(모드)와 10%인 B(프랑소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히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또는 순간의 마음이 이끄는 모드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어긋남을 보호해 줄 프랑소와를 선택하는 길이 나은 판단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하지만 그의 딴에는 올바른 선택이 될 줄 알았던 프랑소와가, 사실은 가톨릭 신자라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과 관계를 가진 타락의 존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녀가 타락의 존재라는 것은 세상의 심판으로 인해 얻게 된 불명예의 칭호가 아닌, 그저 루이의 신념이란 틀 안에서 결론 내린 지극히 개인의 주관에 불과한 이견이 아니던가. 평생을 이러한 모순과 싸워온 루이는 결국 일생일대의 기로가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에 굴복하고, 지금껏 미련하게 지켜왔던 가상의 신념을 버림을 택하며 프랑소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뒤 루이는 어느 한 프랑스의 해변가에서 모드를 만나게 되고, 한때에 프랑소와가 만났던 유부남은 바로 모드의 전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루이는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행위임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진실을 모드의 앞에서 묵살하게 되고, 더 이상 그의 곁에 지성인의 신념이란 형태는 실존하지 않게 된다. 루이는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한 전진과 발전을 막을 뿐인 모순된 신념으로 지어진 끔찍한 감옥에서 벗어나고, 내면이 가리키는 방향에 충실한 '보통'의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이가 스스로의 한계를 깨부수고 성장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확히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자면, 루이가 신념을 버리게 된 이유는 본인의 어리석음을 직접 깨달은 성장의 개념이 아닌 그저 그동안 억누르고만 있던 욕망에 끝내 굴복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신념이 버려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과 함께 해변으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비추는 이미지에서는, 때론 본능에 충실하기도 하며 필요조건 이상의 도덕성을 억지로 지켜낼 필요가 없다는 심적 해방감에서 오는 기쁨과, 결국엔 욕망 앞에 그동안의 삶을 통째로 도려내고 무릎을 꿇은 나약한 인간상이라는 두 가지의 감상이 공존하는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미학의 프레임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