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뱀과전갈

뱀과전갈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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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の光

映画 ・ 1963

平均 3.8

2023年12月01日に見ました。

여백이 많은 영화의 매력은 그 여백을 관객이 직접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겨울 빛>은 여백이 많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본 당신이 그것을 이 글과 함께 채워나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빈 공간을 활자로 채워나간다. 잉마르 베리만은 ‘신의 침묵’이란 주제로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거울을 통해서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그중 <겨울 빛>은 3부작 중 두 번째에 속하는 영화다. 베리만은 종교에 관해 상당히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감독이다. 가정 환경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의 회의적 견해는 이해가 된다. 베리만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어릴 적부터 종교를 강요당해 마찰이 생겨 의절하는 등의 갈등이 있었다. <겨울 빛>은 1963년에 개봉한 영화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20년 정도가 지난 이후의 시기다.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보진 못했지만, 종교인들의 경향은 둘로 나뉘었을 것이다. 신을 더욱 굳게 믿는 사람과, 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돌아선 사람. 유대인이란 이유로 학살을 당하고,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 악마의 움직임이 현세를 헤집어 놓을 때 신은 항상 침묵했다. 빛은 보일 생각을 않았다. 그런 회의적인 배경에서 나온 영화가 바로 <겨울 빛>이다. 요나스는 다소 이 영화에서 엉뚱하다고 느껴질만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요나스는 영화의 톤과는 전혀 맞지 않은 다소 현실적인 화두를 건네기 때문이다. 관념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사색이 오고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현실적인 중국의 이야기를 한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너무 공포스럽다.’ 그런데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게, 그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이것을 공포스러워한다. 이로 인해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인 그가 다시 한번 전쟁을 겪게 된다면, 압도적인 절망감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중국의 문제에 빠져 산다. 요나스에게 기댈 곳은 신 또는 아내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이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을 건드릴 수 있는 막연한 존재인 신에게 다가가 희망의 끈을 붙잡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신의 대리인인 사제는 거기에 악수를 둔다. 요나스에게 자기가 본 신은 추악했다며 신을 대놓고 부정해버린다. 그러나 사제가 한 말의 속뜻은 달랐다. 그가 장황하게 자신의 신념과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까지 그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말은 신은 주변에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즉, 신은 어떤 형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깃들어있는, 자신이 사랑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는가? 수염을 기르고, 펄럭거리는 하얀 옷에 붉은 띠를 매고 있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사제는 그런 신은 불신한다. 전쟁 종군 신부 일을 하면서 악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목격했고, 그 악의 세력을 뻔뻔하게 관조하는 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침묵만을 고수했다. 실재로서의 신은 부재했다. 신의 침묵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신은 죽었다는 것. 둘째, 신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것. 사제의 견해는 전자이고, 요나스는 후자다. 신은 지금 당장 우리에겐 매정할지라도 존재하고, 언젠가 구원의 빛을 내려줄 것이라고 요나스는 믿는다. 그러나 그의 굳건한 믿음이 중국의 뉴스를 읽고 흔들리려던 와중에, 사제의 입에서 신은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실질적인 신은 아내였다는 말이 나오고 만다. 그러자 요나스의 신앙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신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를 신처럼 여기자니, 아내는 자신이 걱정하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신부의 말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죽는 게 두렵지 않다. 이야기를 나누고 요나스가 떠난 이후의 장면에서, 사제는 필요 이상의 찬란한 빛에 휩싸인다. 그리고 나지막이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한다. 예수가 죽음의 끝자락에서 믿음이 사라져 갈 때 했던 말이다. 빛에 휩싸이며 사제의 불신은 다시 한번 굳건해진다. 보통 쏟아지는 빛은 구원을 상징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불신으로 인해 구원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이것은 나중에 나오는 결말부 구원의 암시다. 신부는 요나스의 자살 때문에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다. 신앙을 완전하게 저버린 대가가 바로 요나스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라도 신앙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는 마르타를 통해 다시 한번의 기회를 얻는다. 마르타는 처음엔 신을 믿지 않았다. 사제에게 손이 낫게 어디 한 번 기도를 해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냉소적이었다. 그녀의 손엔 발진이 있다.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신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신에게 울부짖을 정도로 능동적으로 신을 비판한다. 그런데, 그녀는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기도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사제를 사랑해야 한다면서, 그를 사랑하는 건 신이 자신에게 내린 어떤 임무와도 같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절대 순수한 신앙이 아니다. 사제를 유혹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작위적으로 꾸며낸 신앙이자 계시다. 사제가 그녀를 거부한 이유 중 하나는 그 부정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제를 사랑했다. 사제가 그녀를 계속 핑계를 대며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타는 사제를 향해 구애를 보낸다. 영화 내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듯 보였던 사제는 결국 마르타에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진실되게 털어놓는다. 이 장면은 요나스와의 대화 장면과 같은 결의 장면이다. 자신의 개인적 감정(경험)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것. 이 장면은 그래서인지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요나스의 죽음을 우리가 이미 목격했기 때문에, 이 감정의 내지름 이후 균열이 생기면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관객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르타와의 관계는 놀랍게도 안정적이다. 마르타가 신앙이 없었기에, 사제를 신의 대리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의 분노를 신을 향한 믿음의 균열이 아니라 한 개인, 한 인간의 분노로만 받아들였다. 역설적이게도 신앙이 없었기에 마르타는 사제의 감정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고, 사제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마르타에게 사제는 계속 무책임했다. 그녀를 회피하고, 거부했다. 감정을 항상 숨기며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감정의 분출과 솔직한 고백을 통해 사제는 비로소 마르타를 인격체로서 존중해 주게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교회로 가던 와중에 기찻길에 멈춰 서고, 그는 자신이 사제가 되는 것은 부모님의 꿈이었다며, 자신의 의지로 사제가 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사실 독백에 가까운데, 어쩌면 사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믿고 있던 신에게 전하는 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신앙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심연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어쩌면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고백. 그 고백을 지나가는 기차에 떠밀어 보내듯이 말한다. 마르타와 교회에 도착한 사제는 교회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목격한다. 미사를 보는 신자라곤 마르타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히 그녀에게, 그리고 신에게 모두 드러낸 사제가 진행하는 미사에 마르타가 참석한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마르타가 마지막에 홀로 중얼거리는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서로를 위해줄 수만 있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 장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마르타는 신앙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믿음이라는 것이 꼭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성립하는 것인가? 진실이 있다면 믿음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없어도 믿음은 존재한다. 믿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믿음의 증거는 불필요하다. 진실이 추상적이어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종교란 그런 것이고, 신앙이란 그런 것이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마르타는 마지막에 믿음을 가진다. 사제에게 거부당했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여전하기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불순한 것이 아니라, 마르타가 사제와 거리를 두고 있기에 더욱 진실한 신앙으로 빚어진 기도이다. 그녀는 결국 신앙을 되찾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제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불신이라는 강한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신앙을 잃는 자와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의 대비가 보이는 엔딩이다. <겨울 빛>은 구원을 얻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다. 첫째, 마르타처럼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 둘째, 사제처럼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사람마다 격차가 있기에 이 차이를 무시할 순 없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잉마르 베리만은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회의 속에서도 구원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겨울 빛>에서 녹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