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에서, "혐오사회를 향해" 분노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
(※ 이하 스포주의)
<분노>는 일견 'whoduunit' 형태의 스릴러처럼 보인다. 허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범인의 정체보단 인물 간의 믿음과 의심 등 그 감정선에 더 방점을 찍는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세 남자는 모두 낯선 사람이다. 알 수 없기에 의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ㅡ인물 간의 신뢰와 불신 자체를 말하기에 앞서ㅡ 의심의 시원적인 이유는 결국 사회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영화 속 인물들은 지극히 혐오로 가득찬 사회 앞에서 침묵하거나, 무능하거나, 무력하다. 마땅히 '사회의 혐오'로 향하여야 할 그들의 분노는 길을 잃고 타자(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심이라는, 또 다른 혐오로 나타나고야 만다.
#1_아이코, 요헤이, 타시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아이코는 (남자 손님에게 착취당한 건 둘째치더라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혐오적인 시선을 받는다. 그런 세상의 혐오로 인해 아이코와 요헤이는 스스로를 궁핍하게 만든다. 아이코에게 찾아온 타시로라는 행복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내 딸 혹은 내가 행복해질 리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혐오에 분노하는 대신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정작 진실로 다가와준 타시로까지 의심한다.
뿐만 아니라 타시로 역시 그들의 의심에 도망쳐야만 했다. 비록 아이코와 같은 여성혐오가 아니더라도 사회는 특별한 거주지 없이 떠도는 경제적 약자들을 향해서도 혐오의 시선을 던진다. 그러한 혐오를 줄곧 경험해왔을 타시로는 부당한 의심에도 침묵한 채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 타시로는 여태 그런, 도망이 익숙한 삶을 살아왔을 테다.
요컨대 아이코와 요헤이는 자신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에는 침묵하는 한편, 또 다른 약자를 향해 혐오의 시선을 은연중에 드러낸 셈이다. 타시로 역시 그런 혐오 앞에서 항변하기에 앞서 (다들 그러는 것처럼) 침묵했고, 스스로 행복해질 기회를 포기했다.
#2_유마, 나오토
동성애자인 유마는 주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제법 당당하게 사는 듯 보인다. 나오토 역시 그런 유마의 모습에 끌렸다고 (친구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당당함에도, 동성애자라는 점은 유마는 근본적으로 궁핍하게 몰아간다.
유마는 아무렇지 않게 게이 거리를 거닐고 파티를 즐기며 일견 당당한 듯 보이나, 결국 혐오 앞에선 무능하다. 물론 아이코와는 달리, 대놓고 혐오적인 비난을 당하지는 않는다. 다만 엄마나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계속 쉬쉬한다는 점은, 사회 저변에 깔린 동성애를 향한 시선의 결과로, 여전히 어쩔 수 없는 혐오의 피해자라는 방증일 뿐이다.
결국 유마는 사회의 혐오에 진정으로 맞섰다기보단 그저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당당한 척 해도 자신에겐 컴플렉스처럼 자리하고 있었기에) 나오토에 대한 의심은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나오토의 진심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어쩌면', '역시나'로 이어지는 유마의 의심은 끝내 그를 고독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회의 혐오로부터 끝내 자유롭지 못한 결과다.
한편 선천적으로 병이 있었던 나오토는 그 사실을 유마에게 숨겨야만 했다. 신체적 약자를 향한 사회의 시선 또한 그리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병이 오히려 상대를 불행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일까. 자신의 처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숨기며, 유마의 의심조차 순순히 수용하고 만다. 그 역시 아이코나 유헤이처럼 자신이 행복해질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3.1_이즈미, 타츠야
이즈미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혐오 피해자로 그려진다. 이즈미가 성폭행을 당하는 동안, 그러니까 여성혐오에 희생되는 동안 타츠야는 한없이 무력했다. 또한 이즈미 역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말하지 말라고까지 당부한다. 이것이 그리 낯선 선택은 아니다. 세상은 성폭행 피해자에게 정작 더 가혹하고, 그러한 혐오의 폭력에 희생되었다는 게 도리어 흠이 되는 사회기 때문이다.
앞서 이즈미는 남자들 때문에 이사를 다니는 엄마를 두고서 "헤프다"고 표현했다. 명백히 혐오적인 시선. 그랬던 그녀가 혐오에 희생되었다는 점이나 피해 당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엄마"였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혀 의식도 못한 채 혐오 표현을 뱉던 것도,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침묵한 것도, 모두 혐오 앞에서 지극히 무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즈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타츠야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항의해봤자 바뀌는 건 없을 것"이라며 미군 철수 데모를 무시했다. 분노를 거부, 곧 (세상을 향한) 분노가 무력하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러나 이즈미가 정작 미군들에게 희생되고 만 것처럼 세상에 대한 막연한 무력감, 침묵과 외면은 언젠가 스스로를 죄어오는 독이 되어 버리고 만다.
#3.2_타나카
그런데 이들의 에피소드는 좀 더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이들만큼은 외지인, 그러니까 타나카에 대해 의심이 아닌 신뢰를 표한다는 점이다. 다른 두 에피소드에서 외지인은 의심의 대상이었다. 점이 있어서, 얼굴이 닮아서. 그에 비해 타나카는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뢰의 대상이다. 가장 먼저 이즈미의 신뢰를 받으며 친분을 쌓았고, 이후엔 타츠야의 가족들로부터 일을 잘한다며 신뢰받는다. 또한 이즈미의 사건이 터진 뒤에는 타츠야에게서도 전폭적인 믿음을 받았으며, 심지어 타나카가 타츠야를 북돋아줄 정도였다.
그러나 "얼굴만 보면 날 믿는지 안다"던 타나카는 외려 신뢰를 거부 혹은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표현하자면, 일전의 살인 사건은 부인이 자신을 믿으며 동정을 표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즈미에 대해선 성폭행을 방조하는 형태로 그녀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타츠야와 그의 부모님의 신뢰를 향해선 "모든 게 싫어졌다"며 갑작스레 투숙객의 가방을 집어던지고, 조리실을 박살내는 식으로 반응한다. 이처럼 타나카는 신뢰를 적극적으로 혐오하고 증오한다.
요컨대 부부 살인 사건이나 성폭행 방조 등은 일종의 혐오 범죄다(물론 엄밀한 정의를 따르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가 아닌 '신뢰' 자체를 향했을 뿐이다. 물론 그 피해는, 굳이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오롯이 타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생각나는 건 글로 써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혐오는 표출해야만 하고, '怒(노할 노)'를 보란듯이 벽에 새겨넣어야 하는 타나카는 어쩌면 혐오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심어다 놓은 의인화 된 형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타나카는 자신이 행한 혐오 행위로 인해 스스로 파국을 초래한다. 그 순간에조차 타츠야라는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혐오 앞에서 무력했던 타츠야였지만, 마지막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마주한 혐오를 향해 '분노'한다. 허나, 모처럼의 분노건만, (정당방위의 가능성은 별론으로 두고) 살인이라는 범죄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말 그대로 혐오는 자체로 비극을 만들고, 혐오를 향한 분노 역시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온다. 혐오가 이다지도 가까운 사회에서 우리는 결국 혐오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걸 인식하는 것도, 혐오를 향해 분노하는 것도, 분노의 방향성과 정도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라고, <분노>는 씁쓸히 내뱉는 것만 같다.
#4_끝으로
내게 <분노>는 세상에 만연한 혐오에 대해 분노해야 할 사람들이, 정작 아무 말도 못한 채, 엉뚱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렇지만 혐오 앞에서 침묵하고, 무능하고, 무력한 이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자리한 혐오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마치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와이드한 도시 전경으로 시작된 오프닝 씬이 향한 곳은 증오 범죄가 발생한 어느 한 집에 불과하지 않지만, 혐오는 사실 먼저 보여주었던, 그 넓은 사회 전체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몇 사건을 목격했을 뿐, 너무도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곁에 자리한 혐오의 끝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침묵을 지켜서도, 무능해서도, 무력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분노해야 할 것엔 마땅히 분노하고, 끊임없이 불평해야 한다. 이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든지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며 분노하는 걸 (흡사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인물들의 무수한 대사 가운데 타자를 향해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잘 싸워주었다"는 요헤이의 대사가 새삼 울림을 준다.
ps.
우연찮게 영화 일부분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첫 관람 땐 미처 놓쳤던 (혹은 모른 척 했던) 부분을 짚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 추가한다. 지극한 취향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취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태도다.
영화 자체가 숏의 호흡이 짧은 편은 아니지만, 유독 테이크를 길게 가져가는 지점이 있다. 주로 인물의 감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영화는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숏을 좀 더 길게 가져가며 흐름을 유지하려 한다. 예컨대, 중반부 아이코가 타시로의 과거를 아버지에게 늘어놓을 때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점차 인물에게 다가선다. 또한 후반부 (아마 타시로의 결백을 알게 되어) 아이코가 오열할 때, 창문 너머의 카메라가 역시 그녀에게 다가선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 정도는 절제된 듯 보이지만 카메라의 관심은 오직 아이코의 오열을 향해 있어 보인다.
이 같은 롱테이크나 트래블링은 요헤이의 뒷모습, 우는 유마의 모습 등을 붙잡을 때 등 몇 차례 반복된다. 엔딩의 이즈미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물의 감정을 세심히 포착하고 경청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무력을 말하려는 영화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도리어 그들의 무력감을 착취하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영화가 담아내고자 기다리는 것은 오직 인물의 고통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선을 달리하면, 그들 감정에 대한 (카메라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존중으로, 혹은 적어도 피해자의 무력감이라는 주제를 말하기 위한 과욕적인 선택 정도로 양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폭행 씬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즈미의 뒷모습을 향해 (가해자의 시선으로)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다가선다. 이후, 폭행/제압당하는 과정과 플래시포워드를 포함해, 성폭행 씬은 2분에 가깝도록 이어진다. 피해 이후 널브러진 이즈미의 모습까지 포함한다면 더 길 것이다(물론 폭행에 앞서 이즈미가 제압당하고 속옷이 벗겨지는 장면을 굳이 다각도로 촬영한 점 역시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성폭행 씬은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숏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신체 클로즈업이고, 다른 하나는 타츠야를 비추는 가운데 후경으로 실루엣이 제시되는 방식이다. 후자의 경우 (여전히 민감하지만) 나름 수용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신체 클로즈업의 경우는 다르지 않을까. 그나마 가해자의 등을 비추는 숏은, 가해자와 폭력성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폭력의 묘사 자체보단 행위의 폭력성을 환기하는 방식으로써 우호적인 이해가 가능할지 모른다.
허나, 가해자와 이즈미 간 포개진 다리에서 이즈미의 얼굴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클로즈업은 경멸스러울 정도다. 이때 카메라는 단순히 사건을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사건의 끔찍함을, 피해자의 고통을 포착하기 위해 보다 가까이 다가서고 끝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결코 창의적인 선택은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주제와 부합하는 연출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때의 카메라가 아니었더라면, 누구도 굳이 그 위치에서 피해자를 지켜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소 오래된 표현을 가져오자면, 그곳은 "내가 있을 수도 없었고, 있고 싶지도 않았던 곳이다."
심지어 이때 비친 이즈미의 얼굴은 후반부 타나카와 타츠야가 마주했을 때 (플래시백처럼) 반복되기까지 한다. 타츠야는 이즈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즈미의 고통어린 얼굴(의 반복)은 오직 관객을 위한 것이다. 영화는 관객의 분노 내지 슬픔을 이끌어내고자 고통에 신음하는 이미지를 굳이, 재차 가져올 뿐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성폭행 씬에서조차 플래시포워드의 방식으로 이미 관객의 정서적 반응을 요구한 바 있었다.
카메라는 타자의 무력감을 지켜본다는 명목 하에 이즈미의 고통을 전시한다. 심지어 플래시포워드나 플래시백 등의 수사가 끼어들며 관객의 정서적 반응을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이는 단순히 혐오적인 세계를 관조한다기보단 착취하려는 카메라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가 문제삼는 혐오 사회의 모습을 영화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것 같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이따금 <분노>의 카메라는 불가항력적인 타자의 무력감을 쓰다 듬거나 함께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해자의 무력을 탐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마치 영화가 가해자가 된 듯한, 클로즈업은 (철 지난 표현일 수 있지만) '천한'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