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지금 이 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대들이 그립다. . (스포일러) .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충격에 빠졌다. 도저히 그의 영화에 존재해선 안 될 것만 같은 숏들이 연달아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주봉이 연기한 고영환이 끈을 묶는 모습을 그의 발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다 이내 그가 몸을 일으킴에 따라 덩달아 일어서며 캐릭터와 함께 몸을 뒤트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근래 홍상수의 세계에선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인물이 다가올 때까지 복도 코너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그가 반대편으로 멀어짐에 따라 고개를 돌리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또 어떠한가. 아니, 영화 내내 미묘하게 출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길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존재 자체가 그의 영화 세계에선 이미 충분히 생경한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아니라 어느 다른 이름 석 자의 감독의 극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찬찬히 제작사와 배우들과 감독의 이름과 이 영화의 제목을 읽어주던 나레이션의 존재 이유는 이후의 충격에 대비하여 이건 홍상수가 감독한 그의 신작 <강변호텔>이 맞다며 미리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반 극영화라면 익히 보아왔겠지만 홍상수의 세계 내에서라면 거의 천지개벽에 가깝다 해도 좋을 이 '역동적인' 카메라워크는 왜 불현듯 그의 영화에 등장한 것일까? . 위의 의문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홍상수의 세계에 익숙한 관객은 또 한 번 의아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기주봉이 연기한 고영환의 나레이션을 따라 진행되던 몇 분이 지나자, 대뜸 김민희가 연기한 상희의 나레이션이 영화를 이끌기 시작하는 것이다. 홍상수는 하나의 상황들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해석상 간극을 재기 위해 초기작에선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곤 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후로 복수의 화자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킨 적은 사실상 없었다. 갑작스런 복수 화자의 재등장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 엔딩에 이르면 우리는 또 한 번 생경한 풍경을 보게 된다. 바로 고영환의 죽음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누군가가 죽는 풍경이 시각화된 것은 첫 장편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극장전>에서의 죽음은 영화 속 영화에서 그려진 죽음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 <하하하>, <북촌방향>, <그 후>, <풀잎들> 등 흑백의 화면이 죽음의 기운을 담지하는 듯한 작품은 종종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 및 은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 그의 세계에 너무나도 생경한 일반 극영화스러운 카메라를 등장시키고, 초기 몇 작품 이후로 폐기했던 복수의 화자라는 방법론을 되살리고, 그간 직접적으로 프레임 내에 그려본 바 없는 죽음을 바로 담아내며, 홍상수는 과연 무엇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 나는 고영환이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에게 읊어준 자작 시의 내용이 어쩌면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고영환은 그 시에서 '이카'라는 가상의 질서를 상정한다. 개인들은 이카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음에 따라 이분화된다. 이카에 속하는 개인들은 이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두 명의 여인이 이카에서 태어난 덧니 소년을 이카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하나, 이카는 그 소년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하지 않는다. 결국 덧니 소년은 이카 내의 어둠 속에서 자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 모든 상황 위로 눈이 내리고 있다. 상희와 연주는 눈이 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시종일관 눈이 내림을 강조하던 저 시의 등장에도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 위에서 이 영화가 영환과 상희라는 두 명의 화자를 제시한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복수의 화자가 홍상수의 초기작에서처럼 같은 상황이 인물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그런 간극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영환은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가출한 바 있는 남자이다. 상희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바 있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상대로부터 버려졌고 자신들의 사랑이 실패했노라고, 그렇지만 그 사랑과 그에 따른 선택을 후회하진 않노라고 말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끝까지 등장하지 않을 것만 같던 김민희의 불륜 상대 문성근이 기어코 후반 술자리 씬에서 등장하고, <그 후>에서 권해효의 불륜 상대였던 김새벽이 기어코 재등장해야 했던 것처럼, 이전의 홍상수의 영화들이었다면 잠시 헤어지긴 했어도 사랑의 대상인 상대방은 어떻게든 프레임 내에 다시 등장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영환의 아내도, 영환이 사랑했다던 여자도, 상희가 사랑했다던 남자도 끝끝내 프레임 내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번엔 진정으로 '사랑의 실패'를 구현해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영화의 두 화자인 영환과 상희는 모두 사랑이란 명목 하에 불륜을 했고 그 사랑에 실패한 유사 경험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 그러나 영환이 처음 상희와 연주를 만났을 때, 연주가 영환의 팬을 자처하는 것과 달리 상희는 고영환 시인의 존재를 알기는 하나 그의 시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후 영환의 둘째 아들인 영화 감독 병수에 대해서도 연주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익히 아는 듯하지만 상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영환과 상희는 유사 경험을 공유는 하고 있지만, 아직 작품을 매개로 소통하는 지점에는 이르지 못한 작가와 잠재적 독자(잠재적 관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상희가 연주처럼 이미 영환의 작품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독자가 아닌, 아직 그의 작품을 잘 알지 못하는 잠재적 독자로 설정된 것이 내겐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영환이 여러 번 기존에 그의 작품을 혹은 그 자신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들과의 소통에 실패해 온 작가이기에 그러하다. . 영환은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갑작스런 연락을 하고, 그들에게 엄마(자신의 아내)의 소식을 묻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그는 지금 누군가와의 소통에 목마르다. 그러나 사랑했던 여자는 그를 버렸고, 한 때 가장 가까운 사이였을 아내는 그를 '단 하나의 장점도 찾을 수 없는 괴물'이라 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가까운 관계인 두 아들은 어떠한가? 영환은 마지막으로 두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 경수와 병수를 호텔로 부른다. 그러나 경수와 병수는 영환과 같은 카페에 있었음에도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 마치 그들 간 소통의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처럼. 결국 영환이 먼저 그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영환은 그들을 발견한 뒤 자신이 지어준 그들의 이름의 의미를 알려준다. 시인인 영환에게 글은 곧 자신의 예술의 수단이므로, 영환이 아들들에게 지어준 이름도 어떻게 보면 그의 작품의 하나이다. 결국 영환은 자신의 작품을 매개로 아들들과 새로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 아들 경수는 자신의 이혼 사실조차 아버지에게 털어놓지 않고, 둘째 아들 병수는 자신이 사랑을 두려워 한다는 말을 꺼낸 뒤 아버지와 크게 다툰다. 그렇게 작가 영환은 경수와 병수라는 두 독자와의 소통에 실패한다. 이를 시각화하려는 것처럼, 영화 내내 경수와 병수는 영환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를 찾아 헤맬 뿐, 영환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 영환이 그들을 발견하기 전에 그를 먼저 찾아내는 법이 없다. . 고영환의 시를 읽었다며 그에게 사인을 받고 싶다던 호텔 종업원은 무슨 일인지 그에게 사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 그의 팬이라며 그에게 무료로 호텔방을 내 주었던 호텔 주인은 영환이 소통을 거부하자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며 영환에게 호텔에서 나가라 말한다. 더군다나 그 호텔 주인은 프레임 안에 등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연주는 영환의 팬을 자처하고 영환의 아들인 영화 감독 병수의 작품들은 애매하다고 악평을 하면서도, 영환의 사인을 받기보단 대세인 병수의 사인을 받는 김에 영환의 사인도 덤으로 받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결국 먼저 나서서 받지 못한다. . 그를 이미 알고 있던 독자들은 모두 영환과 더 이상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작가 영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환이 한 때 소통을 거부하려 했기 때문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기존의 독자가 모두 그에게서 하나 둘 등을 돌려가는 상황에 영환은 더더욱 죽기 전 마지막 소통을 하고자 절박해진다. 영환이 그토록 상희와 연주에게 먼저 걸어오곤 하는 것도, 아마 자신과 유사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 독자 상희에게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든 들려주고 싶은 열망에서인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상희에게 이카에 대한 시를 들려주었을 때, 상희는 그에게 '좋다'고 말하고, 영환은 미련없이 죽음을 맞는다. . 영환이 이카 안과 밖으로 이분화된 세상을 절박하게 읊을 때, 그가 말한 이카는 어쩌면 작가 자신이 예술이란 미명 아래 쌓아올린 자신의 장벽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어버린 순간 이카에 속해 버린 그는 더 이상 자유롭게 이사를 다닐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실제로는 예술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를 무언가('예술'이 아닌 '이카' 등 다른 어떤 이름으로 멋대로 불러도 좋을 마구잡이의 무언가)로 고집스레 쌓아올렸던 장벽 때문에 다른 이들과 온전한 소통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태어난 덧니 소년은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 온 사랑의 얼굴일지도 모르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일지도 모른다. 두 여인은 그 사랑, 그 작품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만한 인물들이지만, 영환 자신 혹은 이카의 아집으로 인해 덧니 소년은 그 두 여인의 손으로 이카 밖으로 구원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자라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니 소년은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영환은 누구와도 작품으로 소통할 수 없게 된 것만 같은 절망스런 상황에서 죽음을 감지하며, 마지막 소통의 불씨를 그렇게 희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 영화 내에서 시각적 정보와 청각적 정보가 갑자기 동떨어지는 순간이 세 번 정도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영환이 경수와 병수에게 자신의 무료 숙박과 호텔 근처 식당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영환, 경수, 병수의 대화 장면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그들의 대화를 여전히 청각적으로 지속시키면서도 시각적으로는 영환 홀로 호텔 부근을 거니는 영상을 보여준다. 영환의 이야기를 매개로 그들 셋이 동시에 떠올렸을 어떤 풍경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그리고 이 시각화된 정보가 추가됨에 따라 청자는 관객으로 전환된다.). 이후 두 번째 순간도 유사한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때, 화자와 청자는 순간적으로 공통된 영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소통을 이룬 듯도 하나, 그 시각화된 영상은 어디까지나 화자의 실제 경험이나 기억을 구현한 것에 불과하므로 아직 '이카 안의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세 번째로, 바로 영환이 상희와 연주에게 이카에 대한 시를 읊는 순간, 홍상수는 영환과 상희와 연주에게서 갑자기 카메라를 돌려 지금껏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제3자(크레딧엔 '피터'라고 나오는 인물)가 등장하는 일련의 숏들을 제시한다. 화자(이카)에도 청자 혹은 관객(이카 밖)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것(아마도 '덧니 소년')을 화자와 관객이 동시에 시청각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을 때, 어쩌면 이카라는 가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덧니 소년은 구원될 수 있지 않을까? . 죽음을 감지하던 작가는 끝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죽었는지 꿈꾸는지 모를 영환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디졸브로 눈을 감고 흐느끼는 상희와 연주의 숏이 연결될 때, 그 둘 사이를 가로막던 이카의 벽은 무너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홍상수는 사랑의 실패를 선언하고 죽음의 이미지를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들을 총체적으로 폐기해 버렸다. 마치 다르덴 형제가 <자전거 탄 소년>에서 외부 음악을 적극 활용했을 때, 장률이 <경주>에서 박해일, 신민아 등의 스타를 주연으로 활용하며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끌어왔을 때처럼 거대한 세계의 벽이 붕괴된 것만 같은 광경에서, 홍상수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희구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그의 급작스런 변화에 그가 작가적 자존심을 내버렸다고 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률은 <경주>에서 자신의 분신을 상징적으로 죽이면서 자신의 총체적 방법론을 폐기하고 대중지향적 노선을 취한 이후로 어떤 면에서 그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진보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홍상수 역시 그의 영화를 통틀어 가장 노골적으로 작가를 살해하고 자신의 영화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마저도 무너뜨림으로써 비로소 이카의 벽을 부수고 더 멀리 나아갈 채비를 마친 것이라 믿고 싶다. 하나의 관객으로서 나는 그의 꿈을 함께 꾸어줄 의향이 있다. 지금 홍상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대들이 그립다.
このレビューにはネタバレが含まれています
いいね 240コメント 11


    • 出典
    • サービス利用規約
    • プライバシーポリシー
    • 会社案内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