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n

ペイン・アンド・グローリー
平均 3.8
영속하는 고통의 끝자락에서 찰나의 영광을 가능케 하는 예술에 대해. . (스포일러) 극중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메인 캐릭터 살바도르를 곧 본 영화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분신이라 해석하는 건 어쩌면 너무 진부한 도식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동성애자 스페인 유명감독이 주인공인 알모도바르 영화를 보는 순간, 더 나아가 그 인물을 알모도바르 본인의 페르소나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일차원적인 도식을 머릿속에 상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심지어 극중 살바도르의 집은 실제 알모도바르가 거주하는 본인의 저택이 아닌가. . 그의 영화라 해봤자 고작 대표작 서너 작품 정도만 챙겨 본 나지만, 그가 자전적인 모티브를 담은 영화를 줄곧 찍어왔다는 것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어머니와의 유대감을 강하게 들어냈던 그는 어머니가 작고한 직후에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란 영화를 찍었을 정도로 자신의 요동치는 현 상태를 본인의 예술에 즉각 투영하길 즐겨왔다. 그렇다면 굳이 이 시점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이 영화 곳곳에 역력한 <페인 앤 글로리>라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 내용이 심적,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노년의 예술가 이야기라는 것은,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영화의 첫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마치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강조라도 하는 마냥 주인공 살바도르의 허리 수술 자국을 쓱 훑고 지나간다. 아마도 재활의 과정 중에 있는 듯 보이는 살바도르는 물속에 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물밖에 있었던 제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한다. 그가 회상하는 그때의 자신은 지금처럼 허리가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빨래 일을 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허리를 짓누르며 그녀의 허리 통증을 유발하고 있다. 이어서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던 다른 여성들의 노동요가 나릇하게 흐르며 영화의 오프닝은 종결된다. . 이러한 영화의 오프닝은 그저 침울한 자신의 현 상태를 망각하려 애쓰는 한 남성의 심리를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주된 논리가 포진돼 있다. 우리가 오프닝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노래의 흥으로 노동의 고통을 씻어내는 여인들이다. 우리가 고통의 순간을 영광의 순간으로 승화할 때 예술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영화, 그림, 음악 등등 각종 시청각 예술을 영화 전면에 대두시키길 마다 않는 본 영화가 시작부에 슬며시 내던지는 질문이다. . 그러한 지점에서, 예술과 살바도르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극중 그, 혹은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동선을 따져 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영화는 살바도르가 자신의 과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4명의 인물을 각각 다시 만나게 되는 일종의 4부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직접적인 대면의 형식을 통해 다시 재회하진 못한다. . 먼저, 제일 첫 번째로 그가 다시 만나게 되는 인물은 32년 전 자신의 영화에 주연배우를 맡았던 알베르토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물어야 한다. 왜 뜬금없이 살바도르는 32년 만에 알베르토를 찾아간 것인가. 물론 영화는 살바도르가 알베르토의 집에 찾아간 경위에 대한 나름의 구실을 마련한다. 바로 <맛>이라는 영화의 재상영 행사를 위해 살바도르가 알베르토를 행사에 초대해야하기 때문인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전화나 문자라는 훨씬 더 수월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왜 몸도 성치 않은 그는 굳이 이런 불편한 방법을 택했던 걸까. 어쩌면 그는 32년 전 관계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알베르토의 집에 찾아간 살바도르의 모습을 보아하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 사실 그가 알베르토의 집에 찾아간 진짜 이유는 복잡하되 꽤나 순수한 연유다. 바로 그가 우연찮게도 32년 전 자신의 영화인 <맛>에 매혹되어 32년 전 자신의 선택이 오판이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행사 관계자의 권유에 의해 그가 다시 본 <맛>이 예상치 못한 감흥으로 그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으니 사실 상 <페인 앤 글로리>는 예술이 인물에게 먼저 작용을 가하며 시작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 다른 표현으론 주인공 살바도르를 관객의 자리에 앉힌 채 시작하는 영화라 하여도 무방하다. . 극중 살바도르가 영화를 찍지 못하는, 혹은 않는 까닭은 결코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헌데 그렇다고 그는 배부르고 게으른 유형의 예술가인 것도 아니다. 되려 그는 <버닝>의 종수 같이 소재의 빈곤에 시달리는 예술가상에 가깝다. 전자가 어떻게 커리어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초짜 예술가의 방황하는 초상이라면,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는 유종의 미를 거둘 소재를 떠올리지 못하는 고달픈 말년의 예술가 유형에 가까운 셈이다. 이처럼 그는 영감에 굶주린 채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맛>에 매혹되었다는 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굉장히 막중한 순간이다. 이는 영감에 고달픈 예술가에게 우연찮게 도래한 발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그가 매혹된 영화가 요즘의 영화가 아닌, 왜 32년 전의 영화이냐는 것이며, 왜 하필 그는 타인의 영화가 아닌 자신의 옛 영화에 고취되었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왜 그는 자신의 수많은 걸작들 중 하나가 아닌 자신이 이전에 범작이라 평가했던 자신의 영화에 갑자기 빠져든 것일까. . 이는 그 자체로 영화가 견지하는 하나의 시선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자신이 이전에 잘못 행했다고 생각한 행위에 대해 현재의 시점에서 이를 재검토하는 이야기다. 해서 살바도르는 영화 내내 과거의 인물들을 한명씩 만나며 그때 그들에게 자신이 행했던 일을 재고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굳이 자신이 잘못 찍었던 것이라 여겼던 옛 영화에 살바도르가 고무된다는 설정을 부과한 것이다. . 관객의 자리에서 영화를 보며 그 영화에 영감을 받은 필름메이커가 그 다음의 행위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시나리오 작성이다. 그가 <중독>의 각본을 마저 집필하고 스크립트를 알베르토에게 전달한 주된 이유는 당연히 알베르토를 달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재도약 의지를 은연중에 표명하기 위함이다. 관객에서 시작한 살바도르는 어느새 각본가의 위치에 오르며 예술이 인물에게 작용을 가하며 시작했던 영화는 이제 반대로 인물이 제 의지로 예술을 창작하는 절차에 이른다. . 예술작품에 작용을 받은 예술가 살바도르가 각본을 쓰고, 그 각본에 알베르토의 연기가 더해져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 완성되니, 그가 누군가를 찾아갔던 초반부와 다르게 이번엔 누군가가 그를 향해 찾아온다. 바로 그의 옛 연인 페데리코다. . 페데리코와의 눈물겨운 재회를 끝마친 뒤 살바도르는 왠지 모르게 이전과 매우 판이해 보인다. 살아생전 가장 뜨거운 시기를 함께 보낸 이를 다시 만났기에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그의 맘엔 다시금 생존의 욕구가 싹이 튼다. 그리고 정확히 페데리코를 만난 후의 기점으로 살바도르는 마약을 끊고 치료에 매진한다. 영화를 보고 각본을 쓰기까지의 예술창작과정은 어느 덧 그에게 살고 싶음의 감정을 추동시키기 시작함에 이른 것이다. . 많은 고통의 우여곡절이 있었긴 하지만 아무튼 여기까지의 과정은 비교적 순탄한 듯싶다. 허나 이어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인 어머니와 에두아르도와의 과거를 재고하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마냥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선 두 명과 다르게 어머니와 에두아르도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알베르토와 페데리코의 만남에서 곧바로 나름의 교훈을 터득해 삶과 예술에 이를 적용하던 살바도르는 어머니에 대한 과거를 무기력하게 술회할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물리적 만남이 불가한 인물과의 어긋난 관계를 다시 고쳐내기란, 결국 불가능한 일인 것일까? 영화는 3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어머니와의 일을 끝내 청산하지 못한 채, 그리고 살바도르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의 감정을 씻어내지 못한 채 4번째 인물과의 만남으로 곧장 넘어간다. . 그런데,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4번째 인물인 에두아르도를 직접 만나지 않고 예술의 형태로 마주하며 그를 기억하는 살바도르의 행동은 우연찮게도 깔끔히 청산되지 못한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 되며 예술가로서 그의 의지에 다시금 불을 지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자신을 위해 에두아르도가 준비한 과거의 그림을 보며 그는 다시금 회상에 잠긴다. 그 회상 속의 소년 살바도르는 에두아르도의 관능적인 나체를 바라보며 열병으로 위장한 성정체성 자각의 과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퀴어적 코드가 가득한 해당 플래시백을 보고 있자면 관객의 입장에서 다시금 살바도르의 동성연인이었던 페데리코의 존재를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추측컨대 살바도르의 심리 또한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 그 강렬한 자각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살바도르와 페데리코 사이 일생일대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작 그림 하나를 바라본 것만으로 이토록 수많은 사고를 한 살바도르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예술이 가진 의미의 바다를 체감한다. . 영화의 초반부, <맛>이라는 영화가 우연히 찾아와 그의 내면을 온통 뒤집고 갔듯이 이번엔 에두아르도의 그림 한편이 그의 마음을 들쑤신다. 그렇다면 이전에 그가 영화에 자극받아 시나리오를 썼던 것처럼, 다시금 예술에 자극을 받은 상태니 이제 반작용에 해당하는 결과물을 창작해야할 차례다. 이어서 이전까지의 영화를 전복하는 강렬한 라스트씬이 등장한다. . 에두아르도와의 에피소드에서 그가 가장 크게 배워간 것은 볼 수 없는 자와의 관계를 갈무리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타인의 예술에서 그가 크게 감흥 했듯이, 그 역시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을 예술창작의 메커니즘을 통해 씻어내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의 라스트신은 속죄와 영광의 순간을 함께 빚어내고, 라스트신을 통해 살바도르는 관객에서 각본가가 되었다가 마침내 감독의 자리로 회귀한다. . 영화 내내 등장한 플래시백의 일환처럼 보였던 영화의 엔딩에서 갑자기 외화면을 통해 컷사인이 들려오고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하며 이곳이 촬영 현장임을 선언하는 순간, 줄곧 등장한 영화의 모든 플래시백은 마약에 쩐 노인의 무기력한 몽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자체로 영감에 푹 젖은 예술가의 촬영 현장을 담은 미래시제였을지도 모름을 뜻하게 되며 가치가 대폭 격상한다. . 일련의 고통 끝에서 마침내 찾아온 달콤한 영광의 순간에, 어머니는 그의 영화 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고향에 와있다. 그리고 그 직전의 살바도르는 생의 고통과 영광을 모두 포용하기로 맘먹은 채 기꺼이 다시 살아보려는 의지를 동반하여 수술대에 누워있다. 영화를 다 본 뒤 이 살바도르라는 이름이 고스란히 페드로 알모도바르 라는 이름으로 달리 보일 때, <페인 앤 글로리>의 깊은 시선은 텍스트 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여 우리를 감동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