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슬픔이여 안녕>은 부도덕적인 쾌락주의자 세실이 내밀한 자아분열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서사이다. 그동안 고전소설에서 여성의 역할은 도덕적인 현모양처 혹은 부도덕적인 창녀로 남성의 성장 서사에 등장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사강은 이 역할을 뒤집어 시릴과 아버지를 세실의 성장을 위한 소모적 캐릭터로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시릴의 신체적 묘사라거나 키스의 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그동안 봐왔던 남성 작가들의 저속한 성적 묘사가 떠오르면서도 그들에게는 없던 낭만이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릴과 아버지가 단순 소모적 캐릭터라면 세실을 진정으로 성장하게 만든 조력자의 역할은 다름 아닌 안이다. 안을 엘렉트라콤플렉스에 의한 질투의 대상이라 착각할 법 하지만 세실이 안에게 느낀 거부감은 자신을 변화 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서사는 세실과 아버지 사이에 등장한 안으로 인한 갈등이 아닌, 세실의 평온한 삶에 등장한 안으로 인한 변화이다. 저속하고 부도덕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던 세실에게‘그녀는 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자기 성찰에 너무나도 서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안은 내 생활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세실은 안을 통해 자기 성찰과 자유와 존재의 사유를 고뇌한다.(왜 나 자신을 그렇게 비판해야 하지? 나는 그냥 나야. 그러니 사태를 내 마음대로 느낄 자유가 있는 게 아닐까? 평생 처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완패당하고 싶다는 욕망, 애정을 향한 갈망이 엄습했다.’ 안은 유일하게 세실의 감정을 동요시켰고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므로 안의 비극은 그녀가 세실의 아버지와의 사랑이 실패한 것에 대한 결말이 아닌 세실의 성장을 위한 비극인 것이다. 언젠가 안이 세실에게 ‘사랑이란 하나하나 동떨어진 감정이 아니’며 ‘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이라고 가르친다. 사강 특유의 서사에서 보이는 사랑의 부질없음으로 인해 세실은 일상을 되찾지만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다 실패할 때, 조가비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안을 그리워한다. 즉 그녀의 사랑이 어느 방향에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인 셈이다. 저속하고 부도덕하고 생각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던 세실은 안을 통해 슬픔을 조우하며 성장한다.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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