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영

덧니가 보고 싶어
平均 3.6
헤어진 모든 연인들에게 속마음을 묻는다면, 아마 각자의 옛 연인을 어느 정도는 저주하고 있지 않을까? 무슨 부두술하듯 죽음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그냥 날 떠난 이후의 행복 총량이 날 만나기 전보다 좀 적었으면 하지 않을까. 내가 사라진 일상의 허전함을 한번쯤은 느꼈으면 좋겠고, 나와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어떻게든 느끼길 바라지 않을까. 아니면 다 떠나서 그냥 꼴보기가 싫으니까 어디 가서 레고나 옴팡지게 밟았으면, 하지 않을까. 정세랑 작가님이 그려낸 재화의 저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작품 속에서 자꾸만 용기를 죽이지만, 그게 정말 용기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세계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원망, 나와 쌓아올린 것들을 바람 한 방에 너무 쉬이 날려버린 사람에 대한 투정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 가볍고 선명한 저주를 보면서 나는 <응답하라 1988>의 선우-보라 소개팅 장면이 떠올랐다. 보라와 선우는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오래 알고 지낸 사이. 학창시절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어 연인이 되었으나, 보라가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되면서 이별. 이후 각자 잘 살다가 보라가 선우의 학교사람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정말 우연으로 그 자리에 대타로 나온 선우와 마주치는 장면. 한 마디로 구남친이 다니고 있는 대학사람을 소개받으려고 한 구여친. 선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고, 보라는 대답한다. "누난 참 대단하네요.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저랑 같은 학교, 같은 과, 그것도 동기랑 소개팅을 해요. 전 이제 신경도 안 쓰이나 봐요" "1%의 확률로 네가 나오지 않을까. 근데 별명이 쓰레기라고 해서, 아, 1%는 날아갔구나. 근데 다시 생각했지. 그렇다면 다른 1%의 확률에 걸어야겠다. 너 귀에 들어가라.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니까 너 귀에 들어가라. 너 귀에 들어가서 정말 1%의 확률이지만 혹시 네가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에 나왔어. 선우야, 미친 소리 같지만, 보고 싶었어." 물론 재화와 용기가 이 커플처럼 아주 진한 그리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흔하게 볼 수 있는 위악적인 척, 모진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이 느껴져서 떠올랐던 것 같다. 어쩌면 '척'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재화의 생각을 빌리자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 이어져 있는 걸지도 몰라. 성층권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냄새 나는 연기들로부터 안전한 높은 하늘에 우리가 이어져 있는 어떤 망이나 막 같은 게 있는 걸지도. 텔라파시랄 것까진 없지만, 내가 널 오래 생각하면 너도 날 잠시쯤은 생각해줄지 모른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상상하면 평소보다 버텨내는 것이 편해지는지, 아니면 더 지겨워지는지." - <덧니가 보고 싶어>, p94. - 재화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었다. 재화가 쓴 소설들 역시 본편만큼이나 재밌는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재화의 소설집이 나온다면 그걸 사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시공의 용과 열다섯 연인들', '늑대 숲에 팔을 두고 왔지', '해피 마릴린', '러브 오브 툰트라', '닭 발은 창가에', '물고기 왕자의 전설', '항해사, 선장이 되다', '나랑 시합을 할래?' 여덟 개의 작은 이야기들 모두 개성있는 이야기였다. 재화라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았는지 하나만 꼽는 게 어려울 정도로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굳이굳이 꼽아본다면 '닭 발은 창가에', '물고기 왕자의 전설', '항해사, 선장이 되다' 세 개를 픽하고 싶다. 이야기가 술술 읽히고 또 머릿속에 너무 선명하게 펼쳐졌다. 재치있고 여운있는 마무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해당 이야기들을 다 읽고 나서도 쉬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몇 번 정도 입속으로 더 읽어봤다. 여운이 잠잠해질 때까지 웅얼거린 후에야 놓아줄 수 있었던 이야기들. 특히 '항해사, 선장이 되다'는 그 직전 챕터 용기의 '총알을 다섯 개 넣고 하는 러시안 룰렛처럼'이라는 챕터 제목과 이어지는 것 같아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워프를 이용한 우주 항해가 보편화된 시대에 어느날 워프가 불안정해진다면 나는 워프를 이용할 수 있을까. 날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도박을 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장 귀가하려고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날 엉뚱한 층에 내려주면 어떨까. 의아하겠지만 다시 가려던 층을 누를 테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는 조금 더 다른 곳에 내려준다면 어떨까. 그곳은 9.5층이 될 수도 있고, 옥상이나 지하, 혹은 다른 세계나 차원이 될 수도 있다. 건물에 계단이 없다는 가정하에 이런 가능성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을까. 나를 기다리는 가족, 연인, 강아지, 고양이가 있다면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나 역시도 확언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판단을 내리겠지. '항해사, 선장이 되다'에서도 각자의 판단을 내린다. 비록 총알을 다섯 발이나 넣고 하는 러시안 룰렛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어차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총을 맞은 거랑 뭐가 다르겠어. "나는 돌아갈 거야." "어떻게요?" "위험을 감수해야지. 두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 <덧니가 보고 싶어>, p149. -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인류애의 씨가 마를 상황이라고 해도,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해도,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사랑하고 싶은 것들이 있고, 시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냈기 때문에 이 말이 떠오른 거 같다. 아무튼 또 한 번의 경쾌한 여행이었다. 정세랑 작가님 특유의 경쾌함으로 무장된 이야기들, 그래서 기괴한 요소가 나오는 이야기들이라도 과감하게 좋아할 수 있었다. 큰 틀은 스릴러 영화 같은 느낌이라 조금 긴장했었지만, 어쨌거나 그 안 재화의 이야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한다는 말을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래오래 작가님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