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전쟁에서 생존이란 승리겠지만, 오늘 하루를 이긴다 해도 내일 전쟁이 끝나지 않기에, 개인에게 생존은 그저 하루를 살아도 내일 또다시 반복될 임무일 뿐이다. 때문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시간 속에 무엇을 위해 다투는지도 모르는 하루가 이토록 무력하면서도 간절하다. 갈 곳 잃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가.” .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두 눈이 먼 자의 앞에서 생존을 외치는 사람과 두 눈이 감기는 자를 품어 가야할 길을 말하는 사람. . 행운을 빈다는 말은 두번 나온다. 단 하루만을 버티기 위해 목숨을 내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하면서도, 이보다 절실할 수 없는 말. . 두 그루의 쉬어갈 나무도 나온다. 모든 생명의 시작점이자 모든 것들의 쉼터이자 모든 것들의 끝지점. 두 눈을 감아 쉬어갈 나무 한 그루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될 두 눈을 뜰 수 밖에 없는 생존이라는 명. . “영화 <덩케르크>가 전쟁을 재난으로 치환하고 생존을 승리의 희망으로 담아내었다면, 영화 <1917>은 적을 영속된 시간으로 치환해버린 까닭에 생존이라는 명을 받은 인간의 무력함이 느껴진다. 황홀한 롱테이크가 놓친 것이 아니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집요하게 고집한 놀라운 기술적 성취의 너무도 분명했던 이유.” 2시간의 영화가 하나의 원테이크로 이어지는 방식을 택한 건 혁신적이거나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의 끊임없는 샷으로 제공하는 놀라움은 여전히 많은 관객들을 자극할 수 있다. <1917>이 보여주는 기술적인 성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단점들은 아마 기획할 때부터 예견되었을 필연과도 같다. 영화의 이야기가 매우 간결하고 카메라는 제3의 동행자가 되어 두 병사의 앞과 뒤를 오가며 끝내 우리도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보고 있으면 입이 벌어지는 놀라운 기법의 단면은 모두를 현혹시키기에는 힘들 것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이 영화가 고집한 방식의 성취의 단면에는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어있다면 말이다.(그 누군가 중 한명은 내가 되었고 나는 아마 다른 것들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매우 간결하지만 누구에게는 매우 간단할 것이다. 기술에 너무 집착하여 영화에 대한 작고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버릴지도. 롱테이크의 존재 이유가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과 객석에서 흐르는 시간을, 그리고 카메라가 머무르는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동일해지는 순간 우리는 영화 속에 있다는 몰입감을 느끼게 해서 일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중간의 편집점을 찾거나 어떻게 촬영했을까에 대한 감탄의 의문이 피어나는 순간, 롱테이크의 가장 큰 목적인 몰입감만은 실패하게 된다. 아마 이 영화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놓친 부분이라기보다는 필연적으로, 그러기에 고의적으로 두고 선택한 과감한 시도의 피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결과일 테다. 적어도, 이 영화가 왜 롱테이크를 고집해야만 했을까에 대한 이유는 분명한 듯하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경이감이 든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입이 되기도 하지만, 몰입이 깨지는 순간의 이유가 너무도 놀라운 촬영이기에 잠시 집중을 못했던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플레어 불빛이 마을의 새벽을 밝히던 순간부터 불타는 교회를 바라보는 그 장면까지는 영화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장면 중 하나로 화자 될 것이 분명하다.(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거울 속 한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려질 것이다.) 조명과 동선, 구도가 완벽하게 짜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보면서 거슬렸던 영화의 모든 단점들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롱테이크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과 객석에서 흐르는 시간, 그리고 카메라가 머무르는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초반부터 주인공 두 명이 임무를 받으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공동의 적은 제한된 시간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적은 시간이다. (전장에서 누가 죽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추모할 시간조차 없다. 그저 사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추모하기 위해서는 한명이라도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영화 <덩케르크>와 이 영화는 관객에게 전쟁을 체험하게 만드는 점에서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지만 끝내 말하는 건 전혀 다르다. 영화 <덩케르크>가 전쟁을 재난으로 치환하고 생존을 승리의 희망으로 담아내었다면, 영화 <1917>은 적을 영속된 시간으로 치환해버린 까닭에 생존이라는 명을 받은 인간의 무력함이 느껴진다. 전쟁에서 생존은 곧 승리겠지만, 개인에게 생존이란 오늘 하루를 살아도 내일을 살아남아야만 하는 끝나지 않을 임무일 뿐이다. 하루를 이긴다해도 내일 전쟁이 끝이 나지는 않기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기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기에. 때문에 시간과 다투는 매일이 버겁고 막연하다. 고작 몇m를 더 차지하기 위해 며칠을 싸우고, 무작정 뛰어나가 싸울 수도 없었던 세계 1차대전은 말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영화가 롱테이크를 사용했기 때문에 관객인 나는 메신저 둘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제3의 동행자가 될 수 있고, 영화가 시간을 적이라고 말하기에 나 역시 시간을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1917년 4월 6일 전쟁 속 한복판의 상황을 시간과 부딪혀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비유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적과 부딪히며 간신히 버틴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운인걸까. 무력함과 허무함이 밀려오는 경우를 생각해볼 때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떠오른다. 그 모든 역경의 시간을 하나의 방향만을 바라보며 버텨왔지만, 끝내 다다랐을 때에 그만큼의 보람과 비례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렇게 바라왔던 끝을 봤지만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만일 우리의 숙제가 살아 남는 거라면 우리가 인생에 대해 느끼는 모든 무력감과 허무함의 근원은 시간이다.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렇게 버텼음에도 나의 시간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두 눈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감기고 어쩔 수 없이 떠야만 한다. (극도로 피로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눈을 감고 싶어도 떠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죽지 않는 이상 잠을 자도 계속 떠질 두 눈이기에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눈을 떠야 하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생을 두 눈을 뜨고 있을 때와 두 눈을 붙이고 있을 때로 나뉘는데 결국에 우리는 눈을 떠야지만 기록되는 삶이므로 두 눈을 뜨며 기억되는 이 모든 순간은 영화가 끊임없는 하나의 컷으로 확장되는 개념과도 상당히 겹쳐 보인다. 이 영화의 원테이크가 이토록 집요하고 처절하며 피로한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 비참함과 처절한 생존의 현장에도 분명 비참한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그것이 나의 의지가 아닐지라도(블레이크는 혈연과 관계가 있을지라도 스코필드는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명받은 임무이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필연된 인간이 영원한 개념의 시간과 맞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어리석은 만큼 무척이나 아름답다. (더군다나 그저 껍데기뿐인 부조리한 전쟁을 위해 희생되는 여러 젊은이들의 사투 역시)이것이 생존이 그 자체로도 위대하게 보이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이유를 그저 한낱 운이라고 치부하지는 못하겠다. 행운은 눈을 뜨고 있는 이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 다가온다. 생존의 이유가 확장되는 순간(내가 무심코 받은 우유가 한 생명을 살릴 때 처럼),비참한 아름다운 삶 속에서 머무르는 행운들이 시간을 연장시킨다. 우리는 그 행운들을 마주할 때와 깨달을 때마다 잠시 눈을 붙이는 것처럼 이 삶에서 잠시 기대어 쉬어가는 나무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을테고, 우리가 해야할 숙제가 있을테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그저 무너진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아서도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이 끝나기 전까지 멈춰서도 안된다. 그러나 가만히 숨어있을 수도 없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다. 그때 나를 비추는 빛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데, 어둠 속에 초라한 나를 비추는 것인지 혹은 내가 가야하는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인지. 갈 곳 잃은 나를 향해 쏟아지는 이 빛이 야속하면서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세상이 눈을 감은 이 세상에서도 눈을 떠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 우리를 눈감게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두 눈이 먼 자의 앞에서 생존을 외치는 사람과 두 눈이 감기는 자를 품어 삶을 말하는 사람. 행운을 빈다는 말은 두 번 나온다. 단 하루만을 버티기 위해 목숨을 내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하면서도, 이보다 절실할 수 없는 말. 두 그루의 쉬어갈 나무도 나온다. 모든 생명의 시작점이자 모든 것들의 쉼터이자 모든 것들의 끝지점. 두 눈을 감아 쉬어갈 나무 한 그루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될 두 눈을 뜰 수 밖에 없는 생존이라는 명. 쓰러져도 다시 꽃 피울 체리나무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우두커니, 굳건히 버티었던 나무처럼. 그 지독한 시간들을 지나 내가 얼마나 무력한 사람인지 이 고된 삶에서 잠시 눈 붙이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살아가면서 설정한 목적지와 제각각의 임무들이 끝나는 순간마다 허무함이 밀려온다면 잠시 내 두 눈으로 담았던 풍경들을 저만치 멀리서 돌아보자. 롱테이크가 끝나는 순간은 내가 눈을 감게 되는 순간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엔딩을 보게 된다면, 생존이라는 임무를 받고 시간이라는 적과 싸울 우리가 잠시 쉬어가야 할 나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p.s 영화 전체가 원테이크라지만 한번 끊기는 부분이 있긴 있습니다. 너무 감탄하느라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압도적인 촬영입니다. 부디 가장 큰 화면에서 체험하세요. at Scotiabank Theatre Montréal 2018/1/18 같은 극장에서, 같은 관에서, 3번 관람 두번째부터 편집점의 호기심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다, 세번째에 다다르니 그제서야 보인다. 갈 곳 잃은 내가 내일은 또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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