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영제는 이다. ‘보호’라는 뜻과 동시에 ‘감금’으로 직역되기도 하는데, 이 중의성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본 영화에서 그와 같이 중의성을 지닌 것으로 크게는 세 가지를 들어 볼 수 있다. 안전 벨트, 욕조, 그리고 엄마의 품이다.
줄리앙이 아빠의 차에 탔을 때 매는 안전 벨트는 그 일반적 기능 외에도 아빠라는 위협적인 존재에 대한 자신의 신변, 그리고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심적 스트레스에 대한 ‘보호’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안전 벨트는 차 안에서 아빠의 강제를 뜻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하며 아빠의 공간에 줄리앙을 ‘감금’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안전 벨트를 매면 우리의 안정성은 증가할 수 있겠으나 자유로운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표면적인 상황만 보아도 ‘보호’와 ‘감금’이라는 동음이의적 공존을 엿볼 수 있다. 욕조에 숨는 것 역시 앙투안의 총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보호임과 동시에 집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욕조로 점차 그들의 생활 반경을 좁혀 들어가는 앙투안의 감금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품’은 필자가 다소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극후반 앙투안이 초인종을 계속해서 울리는 순간 미리암은 아들을 품에 꼭 들인다. 이 엄마의 품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확대해 보면 그것은 화사한 온실이기도, 동시에 음울한 그늘이기도 하다. “아이가 엄마의 편만 드는 것도 문제의 일면”이라는 판사의 얘기를 떠올려 보자. 영화가 끝난 후 이는 다소 오만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상이나, 한편으로는 그 뜻이 깊은 말이기도 하다. 미리암이 자녀에게 취하는 태도는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그녀가 남편에, 즉 남자에 대해 갖는 불신은 딸의 연애를 방해하게 만든다. 딸이 학원을 빠지고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에 대한 억압이 과연 그녀의 말대로 학원비나 딸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딸이 남자를 만나 자신의 품을 떠날 것을 두려워해서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더불어 미리암은 아들 역시 자신의 품에 두려 한다. 격주로 아들을 아빠에게 보내야 하는 것이 법에 의해 강제되었음에도 줄리앙을 떠나보내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줄리앙의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설령 그 순간 줄리앙이 아빠와의 만남을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줄리앙 스스로의 온전한 생각이 일부 침해된 것은 오프닝 시퀀스의 법정 심리에서부터 드러나 있다. 판사는 미리암의 ‘저희’라는 표현에 대해 그것이 왜 ‘제’가 아니라 ‘저희’인지를 꿰뚫며 반문한다. 이는 아빠에 대한 인식이 아빠의 잘못과 그에 대한 줄리앙의 판단에서 크게 비롯된다 할지라도, 이것에는 엄마의 입김이 일몫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자신’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쪽 부모,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품에 아이를 항상 두고 편을 가르는 것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희생 정신을 고양시킬 위험이 있다. 내가 열심히 잘 자라나 어머니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다짐은 실패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변모할 수 있다. 왜 내가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절대 자식을 자신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차후 자신이 자식에게 희생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호라는 명목 하에 ‘엄마의 품’은 결국 자녀를 가두는 감금 장치가 되기도 한다.
안전 벨트, 욕조, 엄마의 품 이 세 가지 ‘보호’는 세 가지의 소리에 의해 마치 그 불완전함과 강제성을 안내받는 듯 보인다. 첫 번째로, 안전 벨트 경고음이 그렇다. 앙투안의 차에서 울리는 안전 벨트 경고음은 마치 앙투안처럼 줄리앙에게 특정 행위를 ‘강제’한다. 그러나 줄리앙이 벨트를 매도 앙투안이 매지 않는다면 경고음은 끊이지 않고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며, 그 소리는 줄리앙을 괴롭게 만든다. 이 반쪽짜리 보호 장치는 결국 줄리앙이 부모 두 명 모두의 보호가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데, 안타깝게도 줄리앙은 아빠에게 안전 벨트를 매라는 말을, 즉 자신을 사랑으로 지켜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둘째로 앙투안의 총성은 욕조의 불완전함을 신호하며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앙투안이 광적으로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가 있다. 별안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모자는 잠에서 깨 소리를 최소로 설정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으려 한다. 미리암이 줄리앙을 품에 안고 다독여 보지만 앙투안은 멈출 줄을 모르고, 심지어는 총을 가져오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앙투안의 초인종 소리는 마치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엄마의 품’의 불완전함과 강제성을 알리는 경적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잘잘못의 비중을 떠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자녀가 직접 내리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식에게 있어 최적의 보호는 부모 양쪽 모두의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관람 후 딸인 조세핀의 입장에서의 그려짐이 부족함을 아쉬워했으나 돌이켜 보면 영화는 초반부터 조세핀이 성인이라는 사실과 그녀에 대한 보호는 줄리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필요함을 암시해 온 듯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줄리앙의 입장을 한 번 더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된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고통 이후에도 자신을 두고 벌인 양육권 다툼은 줄리앙의 악몽을 연장시켰다. 엄마는 줄리앙이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게끔 만들며, 자신의 의견을 줄리앙을 통해 전달시킨다. 이 순간 줄리앙은 일종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며, 어린 나이에 엄마를 위해 자신을 희생’당한’다.
문제는 그의 아빠 역시 자신을 도구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앙투안의 ‘진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치더라도 결국 그가 아들을 아내에게 접근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관객조차 의아하게 할 만큼 줄리앙과의 첫 만남까지 앙투안은 따듯하고 좋은 아빠처럼 보였다. 허나 그가 줄리앙을 일면 도구화하고 있음이 점차 선명해진다. 결국 줄리앙은 부모와의 삼각관계 속에서 양육권 분쟁이라는 불쾌한 일의 ‘목적’이 되며, 동시에 부모의 불합리한 ‘수단(도구)’이 되기도 한다. 그는 그저 누나의 파티에 가서 신나게 뛰어놀고 싶은 어린 아이일 뿐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다분히 불가항력적인 줄리앙의 고통은 공동 책임이라는 양육 제도마저 저주했으리라.
영화의 마지막 이웃 할머니의 시점 쇼트는 관객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할머니의 신고는 모자의 ‘보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미리암은 그런 우리를 두고 문을 닫으며 다시금 자신과 줄리앙을 ‘감금’시킨다. 아빠가 총을 쏘는 극단적인 상황과 육체적 고통은 경찰을 통해 해결되었지만, 부모 ‘둘 모두’에게서 기인하는 줄리앙의 정신적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특히 이따금 엄마와 누나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시키는 끔찍한 재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반을 점유하고 있는 어두운 이미지, 그리고 계속되는 공포적 소리. 종국에 확연히 두드러지는 이 ‘호러 리얼리즘’은 이 영화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줄리앙, 그리고 스크린 밖의 수많은 줄리앙들에 대한 것으로, 그들에 대한 시선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