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hsiaokang

hsiaokang

3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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ボーイ・ミーツ・ガール

映画 ・ 1984

平均 3.7

웹을 뒤져도 디테일한 해석이나 비평이 하나도 없길래 남겨봅니다. 이 작품이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분들이 계신다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이별, 상상과 파상 -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해석]  - 미성숙 - 소년과 소녀   영화에는 소년도, 소녀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독과 결핍을 앓는 미성숙한 이들만 존재할 뿐이다. 알렉스와 미레이유가 소년과 소녀로 칭해지는 이유는 이들이 미성숙하고 결여된 반쪽짜리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반쪽짜리 둘이 모여 완전함을 이루길 꿈꾼다. 미숙한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알렉스는 사랑을 상상하고, 상상을 사랑한다. 알렉스의 사랑은 사랑하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나이브한 사랑, 소년스러운 미숙한 사랑이다. 상표가 떨어져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마시는 차의 티백과 같다. 영화의 중심점에 있는 알렉스의 사랑은 작 중 삽입된 데이비드 보위의 'When I Live My Dream'라는 노래로 설명된다. 알렉스는 영화 내내 꿈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영화는 공간 구획을 통해 어른과 아이를 분리한다. 알렉스와 미레이유가 처음 만나는 장소인 파티장에는 다양한 어른들이 존재한다. ‘머리에 총알이 박힌 예술가’나, ‘살아있는 시계’라 불리우는 사내도 있으며, ‘달에 착륙한 우주 조종사’도 있다. 이곳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매드 티 파티의 장면이나 어린왕자가 별을 여행하며 어른들을 만나는 장면처럼 동화적인 장소이다. 알렉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흘려 듣고, 이들과 쉽게 어우러지지 못한다. 알렉스는 수년간 우주를 꿈꾸며 살았다고 말하는데, 달에 착륙했던 우주 조종사는 먼 하늘을 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고, 어떤 이는 37세 생일에 가장 슬픈 것은 해놓은 게 없는 것이라며 푸념을 늘어 놓는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은 알렉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일방적인 소리를 해댄다. 이 안의 인물들은 전부 다른 곳을 보거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듣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이 미묘하게 어긋난 공간이다.   알렉스는 방으로 들어가지만, 방은 울고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때 알렉스는 아이들이 잠에 들게끔 하는 영상을 튼다. 잠에 들면 아이들은 울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 나오는 영상에는 울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영상 속 여인의 파티장에서의 잘 손질된 금발의 모습과는 다르게 벗겨진 머리를 하고 어린 아이 같이 울면서 오빠의 이름을 부르짖는, 나체화된 어른의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와 머레이유는 울지 않으려고 꿈을 꾼다. 그들은 꿈을 꾸는 동안은 울지 않는 아이의 영역과, 화장이 번질 정도로 울던 흔적을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가려야만 하는 어른의 영역 그 중간에 있는 소년과 소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알렉스는 결국 그 둘만의 영역인 주방으로 도피해 한 쪽이 깨진 컵에 우유를 따라 마신다.    - 결핍된 이들   영화는 결핍에서 출발한다. ‘Boy Meets Girl’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을 걸어둔 영화들이 보통 1과 1이 만나 2가 되는 클리셰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로맨스를 그려낸다면, 이 곳의 인물들은 무언가 박탈당하고 결여된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시작부터 반 쪽짜리의 모습으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만난다.   알렉스와 미레이유는 고독하다. 사랑에게서 버림 받은 우울한 외톨이들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상상하고, 미레이유는 상상하지 않는다. 알렉스는 미레이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미레이유의 결핍을 사랑한다. 고독한 반쪽짜리 둘이 만난다면 채워짐을 통해 완전한 하나가 될 것임을 상상하고 믿는다. 반면 미레이유는 멜랑콜리와 권태에 빠져있다. 그러한 그녀의 심리는 종종 보이는 죽음욕동으로 표출되고, 그 치명적인 구덩이에서 빠져나가거나 구원받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알렉스에게 꿈이 살아가기 위한 환상이라면, 미레이유에게는 꿈에 빠져들기 위해서 영원한 잠, 죽음이 필요하다.   알렉스 역시 미레이유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파티에서 미레이유가 손목에 가위를 가져가는 광경을 목도하지만 조심스레 문을 다시 닫으며 침묵한다. 이 씬에서 카메라는 실제 미레이유의 모습과 거울에 비치는 미레이유의 모습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알렉스는 미레이유와 한 순간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녀의 모습을 대부분 거울을 통해 접하고, 자기 자신을 보듯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사랑한다.    - 의미를 사랑하는 것   알렉스는 곧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사랑해왔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늘 그가 부여하는 의미가 덧씌워진 채 본질과는 어긋나있는 상상의 존재였다. 알렉스는 플로랑스의 것이 아닌 이름 모를 여성의 스카프를 “너무도 그녀답다”며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간직한다. 여기서 알렉스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스카프가 아니다. 스카프에 그가 부여한 의미다.   살아가기 위해 알렉스에게는 의미가 중요하다. 그는 의미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한다. 그의 집 벽면에는 그가 살아가면서 부여했던 ‘의미의 순간’이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살아가는 것이 곧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곳 살아감인 알렉스는 미레이유에게 지난주에 “자서전을 쓰다가 죽은 꿈”을 꿨다고 말한다. 삶에서의 의미를 기록하는 데에 몰두하다가 죽는다는 것은, 의미에 천착하는 알렉스의 삶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알렉스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꿈을 꾸기 위해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길을 가다 우연히 듣게 된 미레이유의 목소리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의미를 덧씌우며 사랑에 빠진다. 그 이후에 알렉스는 끊임없이 스스로 의미를 생산해낸다. 운명적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초대장을 손에 넣고, 일부러 유리잔을 깨는 등 미레이유와의 인연을 운명이라 믿기 위한 의미들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알렉스가 사랑하는 것은 미레이유인지 그녀의 고독인지,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은 그 본질보다 의미가 아닌지 관객들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 꿈을 꾸는 것   알렉스는 본질을 알고 싶지 않아한다. 오로지 꿈만 꾸고, 꿈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 현실을 싫어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까락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러한 알렉스의 인물적 특징은 그의 독백 중 “난 꿈을 이루려 애쓰지 않고 꿈만 꿔왔어.”라는 대사에 드러난다. 그가 꿈을 이루지 않고 꿈 안에 머무르려는 이유는 상상이 파상되는 순간에 향한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몇 년간 섹스를 갈망해왔어.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전혀 반대였어.”라는 대사에 드러난다. 상상은 이상에 가깝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상상하는 꿈은 쉽게 파상된다. 알렉스가 사랑하는 것은 이상과 의미이기 때문에, 현실을 헤쳐나가는 것은 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빠져 몰두하는 핀볼 게임 기계는 수리공이 들어내자 반짝이는 환상의 이면에 지저분하게 잔뜩 얽혀있는 전선이 보여진다. 핀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핀볼 게임이라는 ‘환상’에 몰두한다. 핀볼 게임에 열중하던 남성은 “다신 속지 않겠다”며 다짐하지만, 핀볼 게임 기계 속의 목소리는 이를 비웃듯 항상 “다시 해 보라. 지구인이여.”라는 소리를 흘려보낸다. 알렉스는 이들과 같이 자신이 부여한 의미와 그 환상 속에서의 삶이 유지되는 것만이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직면하지 않는 것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 현실과 화합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이들은 상상으로 도피한다. 미레이유와 떠나는 기차에서도 알렉스는 환상을 보여주는 핀볼 게임에 시간을 쓰고, 기차를 놓치며 꿈 속에 머무르는 길을 택한다. 그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기보다는 꿈을 꾸는 것을 선택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직면하는 대신, 거울이라는 매체 통해 무언가를 인지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게 애가 있다면 말을 배운 순간부터 무시할거야.”라고 말하고,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귀 담아 듣지 않으며, 자신의 의미를 이야기로 배설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상표가 떨어진 티백으로 우려낸 티는 끝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삼켜진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고 “플로랑스가 좋아하던 색”이라던 스카프의 색을 관객은 끝끝내 알지 못한 채 남겨두는 레오 까락스와도 닮아 있다. 알렉스의 아버지는 알렉스의 이모처럼 죽은 듯 꿈꾸며 식물인간으로 살아갈바엔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지만, 알렉스는 모든 것은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꿈 속에서 사는 편을 택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은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다. 미레이유를 향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독백에서 알렉스는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가. 난 떠났을 때 더 가까운 느낌이 들어.”, “상사병을 앓고 있어. 그걸 잃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은 그 고통으로 뿌듯해.” 이별 후의 사랑은 추억의 형태로 변모하여, 깨지 않고 되씹을 수 있는 꿈이 된다. 미레이유에 대한 알렉스의 일방적인 환상과 같다. “당신과의 시간이 꿈같이 느껴져. 평범하지 않은 꿈, 깊이 잠들어야 꿀 수 있는 꿈.” 그리고 알렉스가 깨지 않으려는 꿈을 꾸는 순간, 미레이유는 악몽을 꾼다.    - 이상   작품 속에서 이상은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공상적인 요소들과 작위적인 양상으로 보여진다. 여기엔 제목에서 보여지듯, ‘이상적인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레오 까락스의 태도가 묻어나있다. 작품 속에서는 싸우지 않는 커플이 없는데, 유일하게 이상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환상과 같이 비춰진다. 첫 번째는 음악을 들으며 걸어가던 알렉스의 눈에 들어오는, 키스하며 회전하는 커플이다. 그 이미지가 주는 작위성은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의 간극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알렉스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들에게 동전을 던진다. 두 번째는 미레이유가 창 밖에서 보는 건너편의 연인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이나 말이 항상 어긋나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항상 같은 곳을, 하늘을 보고 있다. 그들의 이미지는 마레이유의 이상에 해당된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따른다면 이들은 미레이유가 결핍된 것들을 욕망하게끔 하는, 욕망의 매개자에 해당된다. 또,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따른다면, 유리창 반대편에 비춰지는 이 이상적인 커플의 이미지는 미레이유가 경쟁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과의 동일시를 통해 대타자와 같은 이상적 자아를 예기하게 되는 오해의 산물이며, 유리창 앞은 미레이유가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장소이다. 거울과 같이 타자적인 차원인 유리창에 비춰지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들여다보며 본래의 자아는 소외당하고 이미지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동일시하고 고착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유리창이라는 매개에 비춰지는 이상적인 커플의 이미지는 타자적 차원에서의 욕망을 비춰내고, 그 욕망을 끊임없이 모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소통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대화와 소통을 크게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 소통방식의 엇나감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알렉스는 미레이유에게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며 그녀와 소통하고 합일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서 알렉스의 입은 미레이유의 입을 향해 있고, 미레이유는 듣지 않고 멍하니 보고만 있다. 미레이유와 베르나르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베르나르는 “말하고 들었지만, 미레이유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 말한다.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 대화를 ‘들음’으로써 사랑에 빠진다. 알렉스에게는 듣는 것이 중요하고, 미레이유에게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렉스는 현실을 잊고 상상에 빠지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알렉스는 ‘보는 것’들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음악을 들으며 센느 강을 건너다 본 연인들의 모습을 알렉스는 허상과 같이 여기며 냉소를 띄우며 동전을 던지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목격하게된 미레이유의 자살 시도는 못본 척 슬그머니 문을 닫아버린다. 그는 전 애인인 플로랑스에게도 ‘듣는 것’의 영역에 해당되는 LP를 선물하기로 한다. 가는 길에  그의 귀에는 플로랑스와 또마가 속삭이는 사랑의 언어들이 들려온다. 알렉스는 이렇게 ‘들음’으로써 상상하고 꿈을 꾼다. 그에게 사랑의 언어는 ‘말하고 듣는 것’이다. 미레이유에게 독백하듯 사랑의 말들을 잔뜩 늘어놓으며 그녀와 교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귀머거리 노인에 의해 저지당하거나 시끄러운 주전자 소리에 묻히고, 미레이유가 전화를 받지 않는 등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반면 미레이유는 듣지 않는 인물이다. 파티 장소에서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그녀를 위해 곡을 연주하겠다고 말하지만, 미레이유는 듣지 않고 휙 지나쳐버린다. 영화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들은 전부 상상적인 장면인데, 미레이유는 그 장면들에 동화되지 않는다. 그녀는 창가 너머에서 하늘을 ‘보는’ 이상적인 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잊을 뿐이다. 그녀는 입을 자주 열지 않는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텅 빈 눈동자나, 눈물에 잔뜩 번져버린 화장, 흑백 필름 속 피를 쏟아내듯 흩어지는 물 웅덩이나 조용히 번져가는 검은 핏자욱이 그녀의 고독한 목소리를 대변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소통할 수 없다.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볼 수 없고, 미레이유는 알렉스의 말을 듣지 못한다. 알렉스의 소통은 일방적이다. 미레이유에게 일방적인 이야기를 쏟아내고, ‘공중전화’라는 ‘들어야’할 매체에 ‘봐야 하는’ 글씨를 적는다. 미레이유는 전화를 받지도, 그 글을 보지도 못하니 전해질 턱이 없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적는다. 이들에게 타자와의 소통과 교감은 불가해한 영역에 있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 서로를 알 수 있는 ‘텔레파시’만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이상적인 소통 방식이 된다. 알렉스는 미레이유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와 통할 것이라고,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상상하지만 상상적 요소인 ‘텔레파시’가 비현실적인 만큼 타자 간의 거리는 현실에선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귀머거리 노인은 “요즘 젊은이들은 조용하다”며 “말하는 법을 잊은것 같다. 대화할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알렉스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노인은 그의 입을 막으며 “당신은 두려운 것”이라며 영화를 좋아하는지 묻는다. 영화는 상상적 장치다. 살아가기 두려운 이들은 꿈을 꾸고, 알렉스는 영화를 만든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알렉스는 레오 까락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 파상   혼자가 좋다는 미레이유에게 알렉스는 “나도 그래. 그러니 함께 가도 돼.”라 답한다. 그들은 상처받은 두 영혼은 화합하고 합일할 수 있는지, 서로에게서 구원을 찾으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결국 알렉스는 파상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핀볼 게임을 하며 또다시 상상 속으로 도망치고, 결국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스가 미레이유를 찾았으나 그녀는 죽어가기 시작하고, 둘은 쓰러진다. 두 고독한 영혼은 결코 합일되지 않으며, 닿을 수도, 이어질 수도 없음을 재확인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서로 꿈과 사랑과 고통을 나누지만 그들의 교감은 순간적인 것일 뿐, 근본적인 고독과 슬픔을 나누지는 못한다. 그들은 결핍을 상징하는 ‘이 나간 찻잔’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마신다. 이 찻잔은 끝내 반으로 갈라지며, 끝끝내 합일하지 못하는 반 쪽짜리 사랑을 이미지화한다. 알렉스는 고독을 공유하는 이를 만나 결핍을 채우고 완전해지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고독 안에서 죽어갈 뿐이다. 그렇게 쓰러진 그들의 위로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