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나루

黒水仙
平均 3.5
미루고 미루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보는 영화들이 있다. 빠르게 우회해서, 훌륭한 영화감독의 훌륭한 영화들을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더 즐거운 일은 길들여지지 않은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다. 거장의 걸작들이 강한 기준점이 되서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영화들을 보는데 방해가 된다는 얘길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거장의 이름이 거장의 영화를, 정확히는 그들의 개별의 영화들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 거기다 더 나쁜 일. 너무 자주 본 이름인데,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영화제목을 외었을 경우(웃음),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물론, 걸작이라는 말을 어렴풋 듣고 보았는데 실망한 경우도 있다. <비밀의 문>(1948)은 좋았지만, <빅히트>(1953)에서는 실망할 때. 나의 경우엔 다행히 이 문장이 거꾸로다. <빅히트>는 실망스러웠지만, <비밀의 문>은 좋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취향의 문제에 간혹 삽입되는 어구는 시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나름대로의 역사가 존재하는 감상의 역사들. 얼마나 큰 차이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시티 라이트>를 보고나서 <모던 타임즈>를 보았다. <수색자>를 본 뒤에야 <역마차>를 보았다. <이탈리아 여행>을 보고 나서야 <스트롬볼리>를 보았다. <서편제>를 보고 나서 한참 뒤에야 <왕십리>를 보았다. 동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한국계 영화감독들의 영화를 제외하면 타임머신을 탄 영화적 에고. 타디스 같은 것. 회상이 교차하는 이 영화에 대한 소회를 이런 식으로 맛이 간 듯 갈겨쓰고 있는 나를 용서해주길 위대한 두 감독님들(파웰/프레스버거)께 청원한다. 충분히 내게 길들여진 이름들을 게으르다는 말을 감추어 굳이 미룰때 탈출구는 보고 또 보는 수 밖에 없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고 규정짓고 뒤로 넘길때, 그 태도에 조소를, 그리고 고작 상상해낸 이미지에 조소를 보낸다. 반성문. 여담으로, 영화의 '때깔'이란 문제에 굉장히 예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를 봤는데 화면만 봤고, 화면을 봤는데 영화를 보지 못했던 순간들. 아마 꼼꼼히(혹은 우연찮게) TV의 영화채널을 돌리시는 분들이라면 최근에 <아가씨>(2016)가 방영된 것을 알 것이다. 그 영화를 십수차례 보았지만, (스토리가 이해 안되서가 아니라) 그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졌구나라는 걸 내 뇌가 쫓아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태도나, 방식의 우열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가끔, 진짜, 나를 매혹시키는 '때깔'이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취향저격. <검은 수선화>도 그러하다. 화면이 그저 예쁘기만 한 건 속기 쉬우니 일단 긴장하고 보세요라던 한 현인의 말씀을 잊게 만드는 순간. 입이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변호를 시작하는 영화가 가끔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미친 사랑을 할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말씀이나 친구들의 훈계를 죄다 무시했던 것 같다. 그러니 현인의 말씀을 거역해도 내가 나쁜게 아니야라는 생각. 구태여 거리를 두지 않아도 이 사랑은 언젠간 거리가 멀어진다. 뜨겁게 생각하고 대사를 외우고, 그 인물에 몰입해서 현실 속의 나에게 투영시키는 버릇들이 언제였냐는 듯이. 거리를 두고 보면 좋아요라는 말의 전제에 사랑이 있길. 초점은 시간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감정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빛과 빛의 연결. 별자리 같은 것. 너무 꼴볼견 떨었는데, 이 이야기는 모든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직 나는 영화는 뭐다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가끔 어떤 매혹의 경험을 풀어쓸때 이것저것 풀어쓸뿐이다. 금주의 시간이 길어짐으로, 취한듯 갈기자 글쓰기. 영화가 좋았습니다. P.S. 진 시몬스의 춤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