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실패 위에서 다시 노래하는 희망. (스포일러) . 이 영화의 제목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다. 영화는 윤영이 군산에 다녀온 뒤 그토록 보고 싶다던 잎사귀치과에서 내려다보는 신촌 야경을 카메라가 대신 보게 되는 시점에서 이 제목을 화면 전면에 띄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은 이 시점에서 영화가 끝나겠거니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부터 대뜸 과거로 이동하여 2부라 해도 좋을 분량을 더 이어나간다. 왜 영화는 이 영화의 제목을 1부와 2부와 경계 부분에서야 화면 전면에 띄웠을까? 그리고 왜 영화는 이 제목이 등장한 이후 과거로 돌아가 2부를 다시 시작해야 했을까? . 이 영화에는 거울 이미지가 빈번이 등장한다. 거울에 비친 상이 현재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추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허상에 불과하며 그 거울에 비친 상은 실제와 좌우가 뒤바뀐 상이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실제로는 왼쪽에 존재하는 것들은 거울 오른편에, 실제로 오른쪽에 존재하는 것들은 거울 왼편에 이미지로 맺힌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에 존재하는 콜론(:)도 일종의 거울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 영화 제목의 전단 <군산>은 영화 전반부의 주 무대이다. 영화 제목의 후단 <거위를 노래하다>는 영화 후반부에 윤영이 거위 춤을 출 때 읊는 한시의 제목이다. 즉, 콜론(:)을 경계로 하여 나뉜 영화 제목의 각 부분은 각각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를 상징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의 끄트머리에서 윤영의 아버지는 거위를 보고 ‘영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에 등장하는 낙빈왕의 한시 제목 <거위를 노래하다>는 한문으로 <咏鵝(영아)>이다. 한 편, 영화 후반부에서 윤영과 송현은 윤영의 어머니의 고향으로 군산을 이야기하고, 군산에 대한 노래를 부르더니, 대뜸 군산행을 결정한다. 다시 말하면, <군산>에 해당하는 영화 전반부와 <거위를 노래하다>에 해당하는 영화 후반부는 서로를 호명하는 관계에 놓인 거울 관계인 셈이다.. 제목에 콜론이 쓰일 경우 대부분은 왼쪽에 놓은 전단이 주제목, 오른쪽에 놓인 후단이 부제목이라고 일종의 위계를 설정하여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나면 제목 전단에 연결되는 영화의 전반부가 제목 후단에 연결되는 영화의 후반부보다 시점 상 뒤에 놓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전단과 후단에 각각 연결되는 영화의 양 파트가 어떤 위계 관계보다는 서로를 호명하는 병렬 관계에 가까운 구조임을 알게 될 때, 우리가 미리 판단해 두었던 ‘콜론’ 전후의 위계는 어떤 편견처럼 무너지고 만다.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상 사이에서 왼쪽과 오른쪽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처럼. 장률은 거울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상처럼 콜론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제목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양 파트에 대한 어떤 위계 관계를 미리 염두에 두도록 유도하고 다시 이 위계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용이하기 위해 필요했던 임의의 기준들에 의해 이름 붙은 것이다. 콜론을 전후로 한 주제와 부제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 모든 ‘기준’과 ‘구분’들이 선험적으로 존재해 온 것처럼 여기고 있진 않은가? 거울은 그 기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면서 사실 그 기준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존재이다. 장률은 거울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는 이 영화를 통해 그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려 한다. . 영화 전반부에는 군산에서 해괴한 무술을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는 신촌역 근방에서 우슈 체육관을 홍보하며 우슈를 직접 선보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 간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영화 전반부, 군산에서 무술을 하던 남자는 소변이 급해 보이는 윤영을 보며 “참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 영화 후반부, 신촌의 약사는 돈이 없어 돌아서려는 윤영에게 “참을 수 있겠어요?”라고 묻더니 공짜로 약을 건네준다. 두 사람 간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데 영화가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마치 거울처럼 이 숏들을 하나씩 배치해 둘 때, 관객은 그 두 숏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려는 욕망을 참기 힘들다. . 영화 전반부, 윤영의 아버지는 거위를 보고 “영아”라고 부른다. 영화 후반부, 송현은 윤영을 “영아”라고 부르고, 윤영은 “영아”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고 말한다. 이후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윤영은 “영아”라는 제목의 한시에 맞추어 거위 춤을 춘다. 윤영의 아버지가 발화한 “영아”는 자신의 아내가 윤영을 부르던 것을 떠올려 말한 것일 수도, 거위를 보고 낙빈왕의 한시를 떠올려 그 제목을 말한 것일 수도, 아니면 그런 것들과 조금의 연관도 없이 발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모든 “영아”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려는 욕망을 참기 힘들다. . 군산에서 칼국수 집을 운영하는 주인을 연기하는 배우 문숙이 자신의 이름을 묻는 윤영의 질문에 자신의 이름을 ‘백화’라고 밝히는 순간, 많은 관객들은 문숙이 과거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에서 백화라는 캐릭터를 연기했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삼포 가는 길>의 백화와 이 영화의 백화 간에는 어떤 유의미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장률은 <경주>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공윤희’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실제 장률 감독의 지인의 이름을 별 의미 없이 가져다 쓴 것이다(실제 공윤희 분은 이번 영화에도 특별출연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살짝 더해 보자면, 학부 시절에 다른 학과 전공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수업을 진행하셨던 교수님 성함이 ‘이윤영’이었다. 그런데 그 이윤영 교수님께서 이 영화에 특별출연한다. 아마도 장률 감독이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로 있을 때의 인연이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박해일이 연기하고 있는 주인공의 이름은 ‘장윤영’으로, 송현이 윤영의 이름이 남자의 이름도 여자의 이름도 아니라 애매하다고 놀리기도 하고 한시의 제목과도 연결되는 등 ‘윤영’이란 이름이 꽤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에서 ‘이윤영’이란 이름의 인물이 특별출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주>의 공윤희가 그러했듯 이 이름 역시 그저 실제 지인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장률은 바로 전작 <춘몽>에서 한예리,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의 이름을 그대로 캐릭터 이름으로 가져다 쓰면서 그들이 과거 다른 영화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요소들이 <춘몽>의 캐릭터들에도 그대로 반영되도록 한 바 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백화’는 <경주>의 윤희와 이 영화 속 윤영처럼 그 이름이 연결된 영화 밖 다른 요소들이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그저 가져다 쓴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백화’는 <춘몽>의 예리, 익준, 정범, 종빈처럼 그 이름으로 연결된 영화 밖 다른 요소들(그들이 출연한 다른 영화들)이 본 영화에서도 유의미하게 작용하기에 가져온 이름일 수도 있다. 관객이 조금 더 이끌리는 쪽은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 이 밖에도 장률은 어떤 연관 관계를 설정하도록 관객을 충동질하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연관 관계 설정이 과연 유의미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아마도 “우리 본 적 있지 않아요?”일 것이다. 그들은 본 적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장률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간상의 선후 관계를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몇몇 인연은 실제로 그 이전에 ‘본 적이 있는’ 관계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실제로 몇몇 인물들이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관계임을 인지하게 되면 관객은 전반부에 수없이 등장했던 “우리 본 적 있지 않아요?”를 다시금 돌이켜 보며 그들간의 관계를 유추해 보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우리 본 적 있지 않아요?”들 중 태반은 끝내 답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나고 만다. 결국 그 모든 질문들에 기반을 두어 인물들 간의 어떤 관계를 설정해 보고 그 답을 확인하려던 관객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장률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내부의 요소들, 나아가 영화 안의 ‘백화’와 영화 밖의 또 다른 ‘백화’ 등 수많은 요소들 간의 가상의 연관 관계를 확보하도록 추동하는 게임을 걸어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모든 게임의 대표 격인 “우리 본 적 있지 않아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게임에서 관객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일까? . 군산에서 송현은 길을 지나가던 조선족 여성으로부터 연변 출신의 ‘순이’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 그 이름 ‘순이’는 영화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윤영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여성의 이름이 ‘윤순이’이며, 윤순이의 증조할아버지의 사촌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하던 이름 ‘순이’를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송현은 군산에 가기 전 윤영과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큰할아버지처럼 만주에 남았다면 자신도 조선족이 되었으리라는 말을 한다. 자신이 조선족이 되지 않은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윤동주는 연변에서 태어났지만 연희동의 연희전문학교를 다녔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으며 역사에 길이 남은 시인이 되었다. 연변에 남았다면 그는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며, 이른 죽음을 맞지 않았을 수도, 역사에 남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도 그에겐 조선족 딱지가 붙지 않았고, 우연히도 그는 형무소에서 요절하였고, 우연히도 그는 역사에 남는 시인이 되었다. 화교학교를 다녔기에 똑같이 중국과 연이 있고, 똑같이 연희동에 머무르며 시인을 꿈꾸었음에도 우연히도 윤영은 윤동주와 같은 시인이 되지 못했다. 윤동주와 똑같은 재일동포로 후쿠오카에 살던 민박집 사장과 그 딸은 우연히도 윤동주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 연변의 어떤 ‘순이’와 한국의 송현은 친구가 오해할 정도로 닮았음에도 어떤 우연에 의해 한 명은 조선족, 한 명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우연히도 한국 땅에 태어나 우연히도 해병대에 복무했던 윤영의 아버지는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고 조선족을 빨갱이라 부르며 혐오감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우연히도 한국 땅에 태어나 우연히도 치과의사가 된 송현의 사촌언니 역시도 우연히도 한국 땅에 태어나 우연히도 진보 성향을 갖게 된 송현을 빨갱이라 부른다. . 이 모든 ‘우연’들이 우리가 으레 짐작하는 ‘필연’들보다 우리의 일상에 훨씬 가까움에도 우리는 필연에 가까운 연관 관계를 일상 곳곳에 임의로 설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못한다. 자신의 태생과 자라온 환경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음에도 그 태생과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자라온 환경에 따른 개인의 경험들은 그 개개인을 옭아매어 벗어날 수 없는 편견들을 싹틔우고, 그 편견에 기대어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편견에 기댄 판단은 결국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수밖에 없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윤영의 아버지와 화교학교 교장이 친했다는 사실, 윤영이 연희동에 산다는 사실, 윤영이 화교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므로 윤영의 중국어 실력에 “중국인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개인의 경험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므로 결코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윤영도 결국 '송현이 윤동주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송현이 일본식 가옥을 좋아한다'는 전혀 별개의 사실을 굳이 연관지어 송현을 판단지은 것처럼 자신의 편견에 기대어 송현을 재단하려는 욕망을 피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의 진심은 송현의 진심에 가닿을 수 없다. . 그간 조선족, 탈북자 등 소수자에 대한 영화들을 줄곧 만들어 왔던 장률은 작가가 결코 자신이 다루려는 대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낭패감을 <경주>에서 드러낸 바 있다. 그러한 낭패감이 이번 영화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민박집 사장은 사진을 취미로 하지만 좀처럼 인물 사진을 찍지 못한다. 송현이 자신을 찍어달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카메라를 은근슬쩍 다른 쪽으로 돌린다. 윤영이 그의 암실에 들어갔을 때 윤영은 민박집 사장이 송현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 사진은 끝내 선명해지지 않고 흐릿하게 남았다. 카메라로 어떤 인물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낭패감이 민박집 사장의 카메라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민박집 사장과 송현이 함께 군산의 바닷가를 걷는 숏에서 민박집 사장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에 송현은 그 프레임 안에 남는다. 다음 숏에서 민박집 사장과 송현은 다시 한 프레임 내에 위치해 있지만 그 숏은 이전 숏에 비해 지나치게 짧다. 결국 두 인물이 프레임 안팎으로 분리되었을 때의 불안은 그 다음 숏에서 그 둘이 함께 있는 그 짧은 순간만으로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그 둘의 감정은 어긋나고 만다. 이러한 관계의 실패 역시도 민박집 사장의 카메라가 끝내 그 피사체로서의 인물을 파악할 수 없다는 낭패감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 장률은 <필름시대사랑>과 <춘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하는 탐구를 지속해 왔다. <춘몽>의 엔딩에는 영화의 영역에서나마 인물들 간의 연대를 바라는 희망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장률의 비전은 <춘몽>에 비해서 유독 어두워 보인다. . 영화의 전반부에서 카메라가 마치 독립적인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핸드헬드로 돋보이게 움직이는 숏이 두 번 등장한다. <춘몽>의 희망대로라면, 카메라가 독자적인 활력을 부여받음으로써 어떤 마법이 가능하진 않을까 기대해 보게 마련이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무너진다. 첫 번째로 윤영이 남의 집 담을 몰래 넘어 그 집 안팎을 둘러볼 때 카메라가 독자적인 활력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때 윤영은 그 누구와도 조우하지 못하므로 카메라의 독자적 운동이 어떤 유효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두 번째로는 윤영이 절에서 108배 중인 송현을 찾아갈 때의 숏이다. 윤영보다 먼저 건물 안에 들어와 있던 카메라는 윤영이 프레임 내로 들어오자 윤영보다 먼저 헐레벌떡 송현이 있는 방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다음 숏에서 송현은 그곳에 이른 윤영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카메라도 어느새 다시 활력을 잃은 채 두 인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카메라는 1부가 끝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힘을 써 본다. 윤영은 민박집을 떠나 터널을 지나 배를 타고 사진에서 보았고 흑백의 꿈에서 보았던 그 섬을 직접 찾아 나선다. 사진에만 존재했던 공간, 꿈에서 흑백의 영상으로만 존재했던 공간을 현실에 옮길 수 있다면, 영화 안에서만 가능할 법한 진정한 소통도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마침 터널 숏에서 윤영과 똑같은 기대를 품고 그의 뒤를 쫓아온 인물이 있다. 민박집 사장의 딸 주은이다. 주은은 매일 관음하듯 CCTV로 다른 인물들을 관찰하면서도 자폐를 앓고 있기에 실제 인물들과의 소통은 어렵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윤영에게 손을 내밀어 본다. 윤영과 송현이 카메라의 독자적 운동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카메라는 윤영과 주은의 관계에 대해 또 한 번 기대를 품어본다. 배 숏에서 윤영이 있던 자리에서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팬하여 바다를 바라보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 윤영이 서 있던 자리에 주은이 서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카메라의 염원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주은이 윤영의 꿈속 소녀의 움직임을 실현하는 그 순간 숏이 끊기면서 카메라의 염원도 끊긴다. 다음 숏에 이르면, 또 다른 편견을 가진 인물에 의해 윤영은 어느새 성폭행범의 오해를 사고 있다. 그들의 관계도 실패에 이르고 만 것이다. . 장률은 영화 내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내 요소들에 임의로 어떤 관계를 부여하려는 욕망을 느끼고 그 욕망이 필연적으로 실패하도록 함으로써, 일상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으로 인해 결코 다른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영화적으로 반복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는 장률 본인이 작가의 입장에서 느꼈던 낭패감과 맞닿아 있다. 송현이 조선족의 복지를 위해 신촌 굴다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조선족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방증처럼 조선족 여성이 그녀를 연변 출신 순이로 오해할 때 송현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한다. 윤동주처럼 시인이 되고 싶던 윤영은 송현을 사랑하지만 윤영은 윤동주가 될 수 없고 송현은 그의 순이가 될 수 없다. 그 모든 실패의 흔적들이 영화 내내 가득하다. . 그렇지만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희망을 꿈꿀 수는 없을까? 영화이기에 가능한 어떤 희망. 장률도 작가로서 필연적으로 그 카메라의 피사체를 이해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관객들도 영화적으로, 그리고 일상에 있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그 모든 우연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만은 ‘필연적임’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적 실험을 거친 뒤 깨달은 그러한 필연에 있어서만큼은 장률이라는 작가와 우리 관객이 분명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말장난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 하나의 영화를 거쳐 그 정도만큼의 진정한 공감은 가능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 아마 장률 역시도 그러한 희망을 품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개의 상 사이에서 왼쪽과 오른쪽의 기준을 뒤흔들어 놓는 거울처럼, 장률은 영화와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콜론을 끼워넣더니 양자 간의 순서를 뒤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음매에 해당하는 숏에서 그토록 잎사귀치과에서 신촌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윤영의 그 염원을 대행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잎사귀치과에 머물러 그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윤영이 비록 카메라를 매개 삼아 타인과 소통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숏에서 윤영와 카메라는 같은 염원으로 소통하고 있다. 장률이란 작가가 이 영화 안에서 우리 관객과 같은 낭패감으로 소통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이음매를 전후로 시간 관계가 뒤바뀌었기 때문에, 비록 우리는 군산에서의 일들을 미리 전반부에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엔딩에서 윤영과 송현이 그 둘 사이의 관계에 희망을 품고 군산에 갓 도착한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여운을 안고 극장문을 나서게 된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품어보는 희망. 어쩌면 이번에 품는 희망은 우리를 조금 다른 곳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
このレビューにはネタバレが含まれています
いいね 299コメント 28


    • 出典
    • サービス利用規約
    • プライバシーポリシー
    • 会社案内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