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 빛 좋은 개살구들의 사랑과 권력의 전쟁.- . . (스포일러) 영화의 말미에서, 술에 잔뜩 쩔은 에비게일(엠마 스톤)은 꽤나 값이 나가 보이는 도자기 그릇에다 구토를 한다. 고급진 명품의 그릇에 담긴 토사물. 더 페이버릿의 인물들을 표현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더 페이버릿의 인물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효율적으로 행사할 깜냥이 없거나(앤(올리비아 콜먼)), 마침내 원하던 권력을 쟁취했을 때 철저히 무력해진다.(앤,에비게일) 여기에 사라(레이첼 바이스)까지 추가해 세 주요인물의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면 욕망과 질투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정도가 있을 것이다. . 영화의 시간대인 18세기의 영국에선, 실제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이지만 영화의 세 주요 인물들의 주된 관심사는 나라의 대외적인 전쟁이 아니라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본인들의 전쟁에 향해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들의 전쟁을 위해 영화의 공간인 궁궐을 일종의 유사 전장으로 세팅한 뒤 세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을 철저히 수동적으로 전환시킨다. 여왕의 여자. 라는 여성의 의미를 두 번이나 거듭 강조한 국내 제목의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란티모스는 이 영화만큼은 철저히 여성들이 중심에 와야 하고 그 반대급부로 남성들은 철저히 가장자리로 내쳐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말하자면 이제부터 여자들이 한 번 작정하고 싸울 테니 남자들은 잠시 비켜봐 라고 말하는 것 같다랄까? (이분법적으로 보면 영화 속 남성들은 철저히 여성들의 적으로서 기능한다. 앤의 입장에서 남자들은 사탕발림으로 비위를 맞추는 척하지만 속으론 호시탐탐 본인의 권력을 노리는 자들이고 사라는 극중 남자들과 정치적 견해가 강하게 충돌하며 극렬히 대립하는 인물로 설정이 되어있다. 남자를 본인의 신분상승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여기며 어릴 적 끔찍한 신분전락으로 인해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에 강한 적대심을 품고 사는 에비게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 실제로 영화 속 남성들은 어떤가. 사라의 남편인 말버러(마크 게티스)는 영화가 시작하고 머지않아 전쟁터로 보내짐과 동시에 극의 중심서사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에비게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마샴(조 알윈)은 본인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상대적 하층계급인 에비게일의 필요에 의해 끌려 다니며 휘둘리는 인물이다. 더 나아가 그는 남자=늑대 라는 프레임에 박제된 인물이기도 하다.(숲속에서 동물의 자세를 취한 뒤 에비게일을 노려보지만 오히려 조련당하는 것은 그다. 후에 에비게일이 숲속에서 궁으로 돌아온 뒤 앤이 더럽혀진 에비게일의 옷에 대해 묻자 늑대가 할퀴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마샴은 늑대라는 남성의 저속한 측면을 비유하는 프레임에 갇혔다.) 영화에서 최소한의 비중이나 존재감이라도 있는 인물은 그나마 할리(니콜라스 홀트)가 유일한데, 그 역시 앞서 언급한 남성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오로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만을 향해 전력하는 인물이고 그 야망을 얻기 위해 본인의 지위를 과시하며 에비게일을 겁박해 보지만, 종반부에 이르면 그 역시 마샴의 경우처럼 철저히 에비게일의 필요나 요구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적 인물로 전락한다. 추가로 언급하자면 에비게일의 도구로서의 남성이 할리라면 사라에겐 유사한 예로 고돌핀 총리가 있다. . 그렇게 영화에서 남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며 존재감이 미미하다. 허나 그건 영화 속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저속하고 낮은 존재라 그런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여성들의 싸움이란 서사의 중심부에서 그저 강제로 멀어진 것뿐이다. 더 페이버릿의 인물들은 젠더의 기준에서든 계급의 기준에서든 하나같이 못돼 빠졌고 이기적이며 옹졸하다.(누구의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전쟁을 치루는 시국에도 불구하고 랍스터 경주나 하며 놀고 즐기는 여성들은 남성들 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으며(남자들의 경우엔 오리경주라는 병치의 장면이 있다.) 벌거벗은 사내에게 토마토 껍질을 던지는 상스러운 놀이를 오락으로 일삼는 남성들의 행실 또한 영화 속 여성들의 추한 행실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 계급의 측면에선, (상류층의 부패는 영화의 주된 묘사이니 별 다른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고) 처음 온 에비게일에게 양잿물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하녀들로 대변되는 하류층 또한 상류층보다 인격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높게 평가할 측면이 없다.(보통의 영화에서 상류층이 타락하면 그 밑의 하류계급은 그 반대이기 마련인데, 더 페이버릿의 세계는 그런 평범함을 거부한다.) . 극의 무대인 궁궐은 그러한 추악한 인물들의 집합소이고 당연히 극의 주인공인 세 인물 또한 그러한 집합에 종속되어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본인의 그릇에 비해 과분한 호사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데 영화는 광곽렌즈의 촬영을 통해 피사체는 작게, 주변 배경은 폭넓게 담아내며 이를 시각화한다. (그 밖에도 인물들의 유치한 행동이나 대사 후에 바로 장엄한 클래식음악을 이어 붙이거나, 그 추한 순간들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고속촬영의 방식을 통해 영화는 연출로 인물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한다. 인물들의 추태를 근엄하게 담아내는 로우앵글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 얼핏 보면 앤은 윗 문장처럼 과한 호사를 본인의 신분 덕에 누리는 중이지만 에비게일은 그렇지 못하기에 둘은 양 극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몇몇의 연출기법을 통해 이러한 계급의 격차를 무화시킨다. 에비게일이 동료 하녀의 장난에 속아 손에 화상을 입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겨워 할 때, 영화는 그 비명의 사운드를 이어간 채 곧 바로 그 다음 쇼트로 통풍에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앤의 얼굴을 담는다. 그렇게 영화는 은연중에 앤과 에비게일을 동류로 엮어간다. 머지않아 영화는 보이스 오버를 통해 앤과 에비게일을 명확히 동류로 치환한다. 에비게일이 숲에 약초를 캐러 나가는 장면에, 영화는 사라와 앤이 서로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대화의 사운드를 보이스 오버로 흘러 보냄으로서 에비게일이 나오는 해당 장면을 마치 사라와 앤의 플래시 백 장면처럼 보이게 하는 순간의 착시를 자아낸다.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앤이 사라와 처음 만났을 때 말에서 낙마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영화의 첫 장에서 에비게일은 마차에서 떨어졌다. (보이스 오버로 두 인물을 동류로 두는 방식은 감독의 전작 킬링디어 때도 사용된 방식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그렇게 영화는 두 인물의 공통분모들을 제시하며 두 인물이 수직적 신분구조를 무마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음을 남모르게 방증한다. 물론 앤=에비게일 이라고 단순하게 단정 짓는 것은 무식한 접근법일 것이다. (계급적인 부분을 제외하고)앤과 에비게일은 위의 몇몇 연출들로 서로 유사해 진 듯 보이나 이러한 연출만으로 무마될 수 없는 다른 점 또한 수 없다. 앤은 과거의 고통에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현재까지 아파하는 인물이나 에비게일은 과거의 전락과 고통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재의 기구한 운명을 바꾸려는 강한 욕망을 가진 야심가다. 앤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중이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17명의 아이를 잃었다는 정신적 고통이다. (물론 본의 아니게 관심도 없는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는 점 또한 무시 할 수 없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앤은 그녀의 고통을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녀를 보좌하는 사라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깊숙한 고통의 근원까지는 이해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에비게일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지난 삶들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에비게일은 앤을 이해하며 서로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앤을 보듬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 이해의 밑바닥에는 신분상승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에비게일은 그 이해를 욕망의 실현에 대한 도구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에비게일은 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것 같다. 그녀가 무엇에 마음이 약해지는 지, 무엇에 질투심을 느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 지 등을 어쩌면 사라보다 더 잘 간파한 것만도 같다. 앤은 타인의 고통에 취약한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에비게일은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자해를 통해 앤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사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에비게일은 앤과의 첫 만남에서 조차 괜히 기침을 하며 본인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며 고통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을 꺼려하는 인물인데, 에비게일은 이 또한 어떻게 알아낸 뒤 본인의 희망사항을 타인의 입을 빌려 앤에게 전달하여 마침내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후에 앤이 사라에게 “넌 나에게 왜 이리 바라는 게 많아.” 라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로 그녀는 그러하다.) . 그렇다면 사라는 어떤 인물인가. 먼저 영화를 두 가지의 게임의 구도로 놓고 보자. 영화에 두 가지의 게임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게임과 사랑의 게임일 것이다. 앤이 후자의 게임, 에비게일이 전자의 게임을 진행 중이라면, 사라는 게임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권력에서도 에비게일보다 한참 우위에 서있고 앤과의 사랑에서 주도권도 쥐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사라 또한 에비게일과 마찬가지로 전자인 권력의 게임에 임하는 인물인 것 같다. 후자의 경우엔 정말로 사라의 적수가 없지만 전자의 경우엔 본인에 비할 만큼 강하진 않음에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할리가 있으니까. 어쨌든 사라는 권력이든 사랑이든, 에비게일은 결코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만이야 말로 진정한 사라의 패착이다. 사라는 에비게일이 은근슬쩍 본인 앞에서 패기를 부리자 빈총을 발사하며 본인의 위엄을 과시한다. 하지만 빈총만으로 에비게일을 제압할 수 있으리란 계산은 완벽한 오산이다. 그 다음 사격장면에서, 에비게일이 사냥한 비둘기의 피가 사라의 얼굴에 튀는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주도권은 사라의 것이 아니게 되며 게임에 대한 사라의 참전은 필수가 된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영화 속 세계관의 완벽한 평화가 균열을 띄는 장면이라 볼 수도 있다.) . 그렇게 사라가 선택한 게임은 다름 아닌 사랑의 게임이다.(거짓이 난무하는 더 페이버릿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보이는 감정은 앤과 사라의 사랑이다.) 사라는 앤과 함께 진흙목욕을 하며 예전부터 해오던 것으로 보이는 역할 놀이로 묘하게 사랑에 대한 에비게일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에비게일이 느낀 것은 사랑의 낭패감이 아닌 권력의 위기감이었을 테지만.(해당 장면에서 앤과 에비게일에게 놀이의 웃음과 권력의 비웃음을 번갈아 보내는 레이첼 바이스의 연기와 그걸 받아 질투심이 묘하게 얼굴에 들어나는 엠마 스톤의 리액션 연기는 최고다.) 진흙목욕이란 행위는 명확히 어떠한 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진흙이라는 것 자체가 진흙탕 같은 이들의 다툼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면에선 앞서 언급한 동류 치환의 모티브가 떠오르는 구석도 있다. 영화의 첫 장에서 에비게일은 마차에서 떨어져 얼굴에 진흙이 묻는다. 또한 사라와 앤의 대화에서 둘의 첫 만남 당시, 앤 또한 얼굴에 진흙이 묻었었다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유일하게 진흙과 연이 없었던 사라마저 진흙 속 역할 놀이를 통해 얼굴에 진흙을 바르며 스스로 이들과 동류가 될 것임을 자처하고 있는 게 아닌 가하는 추측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셋 모두가 동류항으로 환산된 뒤 진정한 권력과 사랑의 전쟁이 시작된다. . 앞서 말했듯 앤은 사랑에 전력하는 인물이다. 권력은 태생적으로 가지게 된 것일 뿐, 그다지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허나 이러한 진흙탕 싸움은 묘하게도 앤에게 권력의 단맛을 선물한다.(에비게일의 권력에 대한 욕구와 사라의 사랑에 대한 소유욕의 키포인트는 모두 앤이 쥐고 있다.) 에비게일에 대한 사라의 자만과, 앤이 게임의 노선을 바꾸는 변수가 더해져 비극의 화살은 사라에게로 향한다. 사라는 에비게일에게 빈총의 경고사격을 했지만 에비게일은 경고사격 따위는 무시한 채 바로 차에 독을 타 사라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 그렇게 독이 든 차를 마신 사라는 말에서 낙마하고 그로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겨 앤에게 꾸중을 듣는다. 여기서 앞전 문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우리는 사라 이전에도 말에서 낙마하고 얼굴에 대한 꾸짖음을 들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앤이다. (앞에서 거듭 말했듯)앤은 어릴 적 사라와의 첫 만남에서 낙마한 경험이 있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오소리 같은 메이크업으로 사라에게 얼굴에 대한 꾸짖음을 들었다. 결국 사라가 독이든 차를 마시고 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에피소드는, 사라를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내몰아 그녀에게 깨달음을 주는 에피소드로 작용한다. 여기서 또 하나 사라가 느낀 깨달음. 그녀는 에비게일이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느꼈을 것이다. . 그렇게 마침내 사라는 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변했다. 하지만 문제는 앤 또한 변했다는 것이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앤은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서 국가의 중대 사안을 사라의 도움 없이도 결정하는 냉철한 시각을 견지한 인물로 변모한다.(심지어 그 결정들은 결국에 옳았던 것으로 판명이 난다.) 허나 그의 반대급부로 사랑의 진실함과 거짓됨을 판정하는 감식안은 퇴화됐다. 그녀는 결국에 달콤한 사탕발림과 같은 에비게일의 거짓된 사랑을 택하며 사라를 외면한다.(어쩌면 앤은 에비게일의 사랑이 거짓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의 감언에 넘어가 사라를 버렸던 것일까?) . 치졸하기 이를 때 없는 이 난장판은 주제를 선명하게 압축한 기괴한 라스트신으로 마무리 된다. 영화의 앤딩 직전에, 에비게일은 토끼를 지그시 밟으며 본인의 권력적 성취를 마음껏 실감한다.(앞전에 토끼는 앤의 정신적 상흔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제시되었는데 후반부에 와서 에비게일이 그 토끼를 발로 밟는다는 것은 앤의 고통에 대한 에비게일의 이해심이 철저히 권력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에비게일은 권력의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한다. 이번엔 반대로 앤이 에비게일에게 본인의 발을 문지르라 지시하며 본인의 권력적 지위를 과시한다.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머리채 까지 잡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앤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으며 이 둘의 계급적 지위 차를 강하게 명징한다. 허나 더 페이버릿의 로우앵글은 필히 조롱과 희화화의 근엄함을 내포한다. 명확하게 두 인물의 상하관계를 포착하던 카메라는 서로의 얼굴을 디졸브 시키며 두 인물의 얼굴을 겹쳐서 다시 한 번 둘을 동급으로 환산한다. 그리고 두 인물의 얼굴은 재차 디졸브 된 뒤 권력 피라미드의 최하층인 동물들과 오버랩 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영화의 앤딩에 왜 사라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가.” 라는 의문.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영화의 앤딩은 권력의 덧없음을 시각화 하며 동시에 추악한 권력의 승리자들을 권력의 패배자와 동급으로 묶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앤딩씬의 디폴트는 철저하게 ‘권력’인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 영화의 후반부, 사라는 앤과의 애정행각이 담겨있는 위험한 편지를 불에 태운다. 편지를 태우는 장면은 에비게일에게도 주어진다. 사라는 앤과의 사랑이 위협받을 꼬투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편지를 태웠다. 허나 에비게일은 마지막까지 권력에 대한 승리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편지를 불태운다. 따라서 권력대신 사랑을 택한 사라는 권력의 무상함이라는 시각화에서 보이지 않는다. 기괴한 방식으로 권력을 부정하고 사랑을 예찬하는 영화의 이러한 서사 끝에서, 사라는 에비게일에게 “너랑 나는 애초부터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라는 말을 남긴다. 이러한 사라의 말은, 패배자의 옹졸한 궤변으로 보였지만 결국엔 진흙구덩이에서 한줌의 품위를 사수한 승자의 품격 있는 퇴장사로 변모한다. 물론 그녀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앤과의 사랑이 어긋났기에 패자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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