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주인공과 그의 아들이 노인을 발견한다. 세상이 불에타 재로 변하고, 그 재로인해 햇빛마저 약해져 온 세상이 빙하기처럼 추워졌을때,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가 된다. 서로를 약탈하고 죽이고 식인까지 한다. 세상의 끝에서, 사람들은 존 그레이가 말한 현실주의적 태도만을 견지할 뿐이다. 주인공조차 아들로 인해 마지막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이지, 자신과 아들의 생존만을 추구할뿐 다른 이를 돕는데 인색했다. 그는 다른 소년을 돕기를 거부하고, 식인무리들에게 잡혀있던 사람들을 돕는 것을 외면했다. 그러나 누가 비난하랴? 그에겐 자신보다 소중한 아들이 있는 것을. 아들의 목숨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발견한 노인은 또 어떤가? 그는 말한다. 인간이 없는 이 세상에서 신은 없다고. 자신은 신도 행운도 믿지 않는다고. 후술하겠지만 노인은 주인공 부자의 도움으로 몸도 녹이고 음식도 얻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노인은 자신이 그들이었으면 자신을 돕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노인 역시 부자를 강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경계한다. 인간없이는 신도 없다. 생물학적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성 또한 포함되겠지. 이렇듯 모두가, 심지어 약자들이 철저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가는 이 세상에서 아들은 소위 철없는 '발암종자'일까? 그리스신화를 보면, 어느 가난한 부부에게 남루한 차림의 낡은 행자 둘이 방문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루 재워 줄 수 있냐며 다른 곳에선 모두 거부당했다고 선처를 부탁한다. 그 부부들은 흔쾌히 나그네들을 대접한다. 다만 가난하여 빵 몇조각과 와인 몇잔 대접할 뿐. 그런데 이상하게도 빵이 먹어도 줄지 않고 술이 마셔도 줄지 않았다. 그 늙은 행자들은 신들의 왕 제우스와 그의 아들 헤르메스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푸대접한 마을을 물로 쓸어버리고 자신들을 따뜻하게 대접한 부부는 살려주었다.(정확히 기억이 안난다;;/흥미로운 것은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파괴 후의 재창조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다. 판도라가 그랬고 노아가 그랬다. 그러나 불은 다르다. 철저하게 파괴하고 오직 재만 남을 뿐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듯. 오직 절망과 파괴만이 남은 더 로드가 그리는 세상은 그래서 더욱 암울하다) 아들은 노인에게 귀중한 식량인 통조림 몇개를 제공한다. 또한, 식인강도들의 미끼일지도 모르는 노인에게 불을 제공한다. 헤어지기 전에도 식량을 나누어준다. 아들의 노인 대접은 이 신화부분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홉스적 세상의 지배적인 이념인 현실주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행이 부자를 구원할 것인가? 혹은 살아남는(survive)것 만이 전부가 아닌 사는(live)것이 필요하다는 외침일까?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때 스스로 좀비가 되는 것을 선택한 부산행 할머니의 선택과 정확히 반대되는 아들의 행위(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인간이 인간이기를 고수하는)는 인상적이다. 모든 유토피아적 기획은 쓰레기가 되어 버렸고 모두 자신의 소소한 쾌락과 보신에만 몰두하는 '최후의 인간'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아들은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이자 초인의 가능성을 품은게 아닐까? 아버지의 말처럼 아들은 신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역설적으로 그리스신화와는 반대로 늙은 행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신인 것일까? 최후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가아갈 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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