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승

출근길 지하철
平均 4.3
2024年12月26日に見ました。
건강 이데올로기와 정상성 규범은 나를 늘 괴롭혀왔다. 나는 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지방을 갖고 있었고, 나이에 비해 책임감도 철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살을 빼고 나이에 맞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해도 늘 나보다 더 정답에 가까운 사람을 보며 괴로워할 것이라는 걸 언젠가 깨달았을 때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상이 굴러가는 속도는 내가 굴러가고 싶은 속도에 비해 언제나 너무나 빨랐고 나는 그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배제됨을 감각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뚜렷한 감각은 명문대학생이라는 꼬리표를 얻고 오히려 급속도로 심화되었다. 이곳엔 세상에서 옳다고 말하는 속도에 열심히 자신의 속도를 맞춰 빠르게 달려가는 정상(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의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내가 '느린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된 것은 결코 추후 갖게 된 장애인운동에 대한 관심과 관련이 없을 수가 없다. 나는 느린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렸을 때부터 강하게 감각했다. 나는 늘 내 주변의 나보다 빠른 사람을 따라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아이였다. 나보다 수학 문제를 빨리 푸는 친구, 나보다 달리기가 빠른 친구, 나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친구, 아니면 정말 특별하고 대체 불가능한 재주를 가진 친구... 다들 나의 열등감을 부추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남들과 속도를 비교하며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느린 데서 나의 가치를 매겼다. 나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빠른 축에 속했지만 그 빠른 아이들 속에서는 늘 느린 사람이었다. 나는 비범하지 않았고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나의 속도는 만들어진 속도였다. 엄마가 열심히 맘카페에서 뒤져 알아낸 학원들로써, 내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주변에서 나를 잡아주는 학원 선생들로써,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는 선행 학습으로써. 그리고 이런 것들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권을 가졌음에도 행복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특권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여자 되기에 실패하는 경험 역시 나에겐 시간성의 개념으로 다가왔다. 대학생이 되는 순간 나는 여자 되기를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다는 압박을 받았다. 내가 존재하고 싶은 대로 존재하면 세상의 틀에 맞아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여자가 되기 위해 나름 노력을 기울여봤다. 화장을 좋아하는 친구한테 화장 강의를 듣기도 하고, 비록 정말로 내가 화장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새로 산 화장품들을 전부 그 친구에게 줘버렸지만. 머리를 기르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누굴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는 건가 현타가 와서 다시 자르기를 반복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에만 그나마의 노력을 쏟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자 되기의 노력은 도무지 내가 흥미를 붙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나에게 편하게 존재할 권리를 변호해주는 이론을 접하고 내면의 평화는 찾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멋대로 존재하는 나의 몸은 사회에서 비정상의 틀에 놓인다. 나는 또래 '동성' 친구들에 비해 느리고 덜 성숙한 '톰보이' 취급을 받는다. 성소수 중에서도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유독 정상 시간성을 교란시키는 정체성 같다.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따라야 할 발달 단계를 고대로 따르지 못하고 어디선가 탈선을 해버린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언제까지 나는 톰보이로 불리며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내가 몇살쯤 먹으면 톰보이라는 개념으로 나를 선해해주길 포기하고 비정상의 틀로 치워버릴까? 시간성을 다르게 감각한다는 이 감각, 삶 자체가 너무 버겁고 힘에 부치다는 감각, 그런데도 결코 이 사회의 시간성에 굴복하고 그 속에 나를 갈아넣고 끼워넣고 싶지 않다는 고집, 죽어도 나는 나대로 살다 가고 싶다는 자기애. 이런 것들이 나를 장애해방운동과 연루시키는 것 같다. 왜 비장애인인 너가 장애인운동에 관심을 갖느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장애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가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것까지 짚어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