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기연

ゴダール・ソシアリスム
平均 3.0
노장의 강단있는 영상 실험. 제목 그대로,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사적 소유로부터의 탈피를 말한다. . (2013.3.31.) (스포일러) . 1부 '이러한 사물들(DES CHOSES COMME CA)'의 무대는 여객선이다. 1부의 첫 장면에서, 포말 가득한 바다가 화면을 메우면 그 위로 '돈은 마치 물과 같은 공공재'라는 말이 선언처럼 제시된다. 그 뒤, 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데사, 헬라스, 나폴리, 바르셀로나 등의 지명이 화면 전면에 자막으로 뜨며(이때 오데사의 경우, '접근 금지' 자막이 추가로 뜨더니 그냥 넘어가고, 헬라스 같은 경우 자막이 'HELL AS'로 제시되더니 현재가 아닌 과거의 영상들이 잠깐 동안 제시되고는 넘어간다.) 마치 여객선이 그곳들을 경유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새로운 지명이 뜰 때마다 '사물들', '이러하다', '이러한 사물들' 등의 자막과 함께 배 안의 이곳저곳을 비추며 거한 식사, 음주, 파티, 도박, 예배, 댄스 레슨, 클러빙 등 다양한 소비와 그에 따른 쾌락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스페인 내전 당시 선박에 실린 뒤 사라져버린 금화의 미스테리를 골드베르크라는 의문의 남자와 그를 의심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동시에 여객선의 다른 인물들을 이들과 느슨하게 연결시키며, 수많은 인물들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다시피 한다. 1부는 이처럼 공공재로서의 물 위를 유유히 떠 가는 여객선, 그리고 그 안에서 돈 위를 헤엄쳐 다니는 현대인들을 툥해 돈을 이야기하는 파트이다. . 영화는 그 과정에 있어서 어떤 장면들은 조악한 화질로(대체로 클럽 장면처럼 소비와 유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이런 식으로 제시하곤 한다.), 또 어떤 장면들은 선명한 화질로 제시하는가 하면, CCTV, TV 화면 등 다양한 포맷의 영상들을 다채롭게 사용함으로써 일부러 그 통일성을 무너뜨린다. 또한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면서 그와 전혀 별개인 음성적 정보를 그 위에 덧입히거나, 혹은 인물들의 대화 장면을 보여주면서 제3자가 다른 언어로 떠드는 소리 혹은 이런저런 소음들을 겹쳐 놓거나 갑자기 또다른 인물이 장면에 뛰어들어 대화의 흐름을 깨거나 하는 식으로 장면 내의 정보를 흐려버리기도 한다. 영상과 음악이 뜬금없이 튀어나오거나 다시 갑작스레 멎어버리는, 혹은 뚝뚝 끊기거나 느려지거나 아니면 화면이 깨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 장면 간 연속성이 사라진, 더불어 그 각자의 존재로서도 완결될 수 없는 파편화된 장면들, 그 장면들 사이로 수많은 정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러 요소들의 개입으로 인해 우린 그 정보들을 온전히 취합할 수 없다. 스페인 금화에 관련된 미스테리만 해도, 여러 인물들이 그 골드베르크란 인물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대화들을 듣지만, 그 대화들은 파편화되어 있고 방해받으며 따라서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은 채 끝나고 만다. . 소비의 과잉, 정보의 과잉, 쾌락의 과잉, 이 과잉의 왕국 여객선 안에서 영화는 핸드폰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 등으로 무언가를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1부에서 제시되는 모든 영상들은 서로 종속되지 않은 평등한 존재들이지만 더불어 불완전하고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 다양한 영상 포맷의 연장선처럼 보이는, 이 사람들의 사진 촬영은 아마 또 다른 파편화된 잉여들만을 낳을 것이다. 영화는 그들에게 이 소비와 쾌락으로 오염된 땅에서 과연 무얼 찍으려 하느냐고 묻는 듯하다. 1부가 말미에 다다르면 어떤 여인이 카메라를 향해, 관객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더니 사진을 찍는다. 화면이 뚝, 뚝 끊긴다. 관객을 찍기가 무섭게 파편화되는 화면. 아마도 영화는 관객들이 앉아있는 현실도 그 여객선의 연장이라 말하는 것이리라. . 1부의 끝,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자막은 'QUO VADIS, EUROPA(어디로 가는가, 유럽이여)'이다. 2부는 프랑스의 어느 지방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마르탱 가족의 이야기이다. 지방 선거에 입후보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3채널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지만 마르탱 부부는 지속적으로 인터뷰를 거절하고, 리포터와 카메라맨은 그 집 아이들과 주로 시간을 보낸다. 한 편,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인터뷰에 실패하는 것과 별개로 가족들의 이야기가 인터뷰처럼 제시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이 곧 떠날 것이라 말하고, 어머니와 딸의 대화 혹은 가족들 간의 육체적 교류는 그다지 다정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딸은 미성년자는 입후보가 불가능하다는 말에 프랑스 부채를 미래 세대들이 떠안게 되는데 어찌 미성년자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냐고 되묻거나 부모에게 자유와 연합(이 둘은 프랑스의 세 가지 가치 중 Liberte와 Fraternite를 가리킨다. 후자는 종종 '박애'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연합', '유대'가 더 적절하다.)에 관해 공격적으로 물어올 만큼 당돌한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딸은 동생에게 종종 'be동사를 말하는 자들과 대화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들은 자신의 몸짓을 매개 삼아 이야기 바깥의 음악과 조응하는가 하면 아무 말도 없는 동물 라마와 시간을 보내는 등 어떤 경계를 뛰어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 2부의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는 마르탱 부부가 아닌 딸과 아들, 플로린느와 루시앵이 입후보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부모의 성을 떼어버린 채' 입후보했고 높은 득표율로 당선된다. 그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자유로워져라, 그리고 연합하라(플로린느가 어머니께 대답을 요구했던 그 Liberte와 Fraternite 문제의 연장이다.)'이다. 부모 세대와 절연한 미래 세대의 정당, 고다르가 그리는 유럽의 미래는 아마도 그런 모습인 듯하며 그에게 있어 그 미래는 아마도 프랑스의 참 가치에 더 근접한 미래일 것이다. . 3부의 제목은 '우리의 휴머니티(NOS HUMANITES)'이다. 1부의 그 지명들을 다시 호명하는데, 이번에는 현재의 여객선이 아닌 과거의 각 지역의 역사나 신화 등을 담은 기록 영상 혹은 영화의 몽타주가 끝없이 이어붙는다. 1부에 결여되어 있던 뿌리의 흔적들, 이제 1부에서 '접근 금지'되었던 오데사 부분에서는 그 유명한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장면이 제시되고, 'HELL AS'로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듯 제시되었던 그리스 부분은 온전한 이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 영상의 여정이 펼쳐지는 와중에 남자와 여자의 나레이션이 그 위로 흐른다. . 이 3부에 있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 첫 째, 2부에서 딸 플로린느의 대사의 연장선 상에서 3부의 나레이션은 'be동사는 현실을 가리키지 못한다'며 그 예로 '곧 바르셀로나다(be)'라는 말보다는 '바르셀로나가 우리를 환대할 것이다'라는 말이 더 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고다르에게 있어 '~이다'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는 수식어인 듯 하다. 과거의 시점을 다룬 3부에서 단지 머물러 있는 그 무엇이 아닌,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어떤 '움직임'들만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 둘 째, 3부의 나레이션 내용 중 어떤 부분에서 신화 속 예언가 카산드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나레이션에서 카산드라는 '신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답하고 '그러면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테냐'고 묻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한다. 예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했던 비운의 예언가 카산드라,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그녀는 끝까지 침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 그리고 셋 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법이 정의롭지 못할 때, 정의는 법 앞에 나선다'는 문구가 화면 전면에 뜨더니, 저작권 침해에 대한 경고를 담은 FBI 경고문 화면이 나오고는, 'NO COMMENT'라는 문구와 함께 영화가 끝난다. '정의는 법 앞에 나선다'는 문구 뒤에 저작권법을 담은 경고문이 뜬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영화 속 고다르의 입장에 따르자면 그 법은 정의롭지 못한 법이다. . 고다르는 '소유'를 강조하는 법을 정의롭지 못하다 규정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그에 대항하고자 한다. 이때 그는 누구도 믿어주지 않음에도 침묵하지 않으려는 결연한 카산드라의 자세를 자신이 추구하는 태도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는 그 정의롭지 못한 '소유'의 법 앞에 자신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셈이고, 그에게 그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바로 위에서 말했던 'be동사를 거부하는 어떤 움직임의 연속'이다. . 시작은 현재이다. 일견 여객선 안에서 소비의 과잉 아래 철저히 썩고 있는 듯한 그 병리적 현상들로 가득한 현재에서도 여객선은 계속 물을 가르며 항해하고 있고, 그 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찍고 있다. 이때 수많은 포맷으로 제시되는 영상들은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그 어떤 누군가에게 소유될 수 없는 각기 평등하고 독립적인 영상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의미를 창출하는 데 실패하고 있지만, 또한 여전히 파편화된 채 병리적인 현상들의 연장선 상에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계속 찍고, 기록한다. . 한 편, 1부에는 알리사라는 젊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이나 목걸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전달하는 책 '좁은 문'으로 보아, 그는 명백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등장하는 알리사의 은유이다. 그녀는 병들어가는 듯 보이는 현재에 살아숨쉬는 희망이며, 끝없이 움직이는 '촬영'의 행위들은 그 희망의 또다른 증거들이다. 고다르는 그 영상의 파편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하나의 소우주 속에서 압축적으로 진단하는 동시에, 그 움직임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어디론가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고다르에게 있어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be동사'가 아닌 '움직임'이 필요한 것이다. . '어디로 가는가, 유럽이여'라는 질문 뒤에 대답처럼 등장하는 2부는 그 '움직임'이 경유하는 한 지점으로서, '유럽이 나아가야 할 미래'로서, 미성년자들이 부모와 절연한 채 프랑스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동적인 변화 양상을 제시한다. .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과거로서의 3부이다. 현재에서 지나쳤던 그 지점들을 다시 지나가며 그 장소마다 숨겨져 있던 과거들이 동적인 영상의 몽타주로 제시된다. 이 경우엔 아예 고다르가 찍은 것이 아닌 기존에 존재하던 영상들을 차용한 것이다. . '소유'는 우리를 머무르게, be동사 안에 갇히게 한다. 1부에서 여객선 안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병리적인 현상들은 모두 '소유'에서 비롯된 형상이고, 그 여객선을 동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평등한, 소유되지 않은 영상들'을 통한 '움직임'이다. 더불어 미래를 진단하거나, 과거를 재현해내는 데 있어서도 고다르는 부러 성년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리를 미성년자에게 대가 없이 배포하는가 하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영상을 차용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그러한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움직임'은 '소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외치는 듯하다. (영화가 과거-현재-미래를 단선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현재-미래-과거의 형식으로 꼬아서 제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1부 중간에 '기하학으로의 회귀'를 외치는 강연 장면이 등장하는데, 마치 그 강연에 조응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의 구조는 그 단선적인 진행을 배제하고 '기하학적 움직임'을 추구한다.) . 3부의 말미에 가면 누군가가 애타게 '알리사'의 이름을 부른다. 1부의 희망을 알리던 그 소녀의 이름이다. 마치 그 소녀가 과거를 돌아보아야만 그 희망이 미래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양, 3부의 그 누군가의 목소리는 과거의 위치에 서서 현재의 알리사를 부른다. 그렇다면 '평등한, 소유되지 않은 영상들'의 시도는 '소유하지 않은 영상의 차용'을 통한 조금 더 본격적인 '소유의 부정'을 통해 그 희망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닐지? . 그리고 마치 이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인 양 영화의 첫 대사인 '돈=공공재'의 선언,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소유를 긍정하는) 법이 정의롭지 않다면, 정의가 법 앞에 나서야 한다'는 선언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함께 소유를 부정하며 영화를 묶어내고 있다. . 비록 그 내용을 온전히 품어내기에는 영화가 조금 난해했던 터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노장이 자신의 담대한 메시지를 영상 실험과 함께 제시하는 이 도전 정신에는 정말이지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메시지를 긍정하고 안 하고는 나중의 문제이다. 극장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