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별을 보고도 죽음을 떠올린다. / 1. 토마스 엘리엇의 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피카소의 그림. 오펜하이머의 고된 타지 생활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유명 작품들이 다소 느닷없이 영화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예술가는 모두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한다면 세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업적이 지닌 혁신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혹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마찬가지로 넓은 분야에 걸친 그의 영특함과 고고한 취향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을 던져보고자 한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쥐여준 프로메테우스, 그 또한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오펜하이머가 매료된 아름다움은 시와 그림에 그치지 않는다. 밤하늘에 마음을 빼앗긴 사내는 종종 텅 빈 대지에서 우두커니 별빛을 즐겼다. 뉴멕시코와 물리학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지피는 법이다. 우주의 원리를 살피는 물리학은 별에 다가가는 그만의 방식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물리학자의 머릿속을 재현하듯 반짝이는 빛 놀음으로 가득하다. 이때 입자와 별의 움직임, 물리학 강의, 그리고 예술이 교차한다. 고도의 이성을 요구하는 자연과학과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예술의 접점은 무엇인가.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넌지시 답을 던진다. 오펜하이머의 연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초신성의 매혹적인 자태가 지구인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오직 찰나의 미적 감성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유용함을 산출하지 못하는 과학은 세계의 ‘진실’을 탐닉하는 예술과 닮았다. 자연과학은 순수과학의 이름으로, 또 응용물리학과 대비되는 순수물리학의 이름으로 예술과 상통한다. 하지만 별을 헤던 소년은 끝내 죽음의 화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절대 무용(無用)의 세계에서 세속의 최전방으로 추락하는 통로와 같다. 학계에서 로스앨러모스로 거처를 옮기며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세계의 파괴를 기획한다. 우주의 본질적 힘은 어느새 대량 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2. 핵폭발은 즐거운 쇼가 될 수 있을까?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다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의 관심은 단 한 장면에 쏠렸다. 그런데, 이 ‘죽음의 쇼’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의 관객만이 아니다. 극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관객만큼이나 대폭발의 스펙터클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착용한 고글이 3D 안경을 연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공적인 실험 결과에 과학자들은 환호하며 즐거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화관의 관객에게 폭발이나 화구 자체에 그다지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폭발의 순간에는 오직 미세한 숨소리와 죽음의 신이 재림했다는 목소리뿐이다. 스펙터클은 오히려 거대한 폭발 이후의 후폭풍이 관객을 덮칠 때 본격화된다. 이로써 극 중 관객과 현실의 관객은 각각 환희와 공포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연설 장면에 이르러 오펜하이머는 현실의 관객에 더욱 가까워진다. 줄곧 주인공을 괴롭히던 발 구르는 소리가 가시화된다. 그의 힘찬 연설에 영화 속 청중은 연신 환호를 내지른다. 하지만 정작 연설의 주인공은 그 환호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환상을 통해 피폭된 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시작된 원죄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낙진에 구토한다. 연설장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물은 오펜하이머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뿐이다. 별을 사랑하던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손에 묻은 피 냄새에 괴로워한다. 죄책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인지하고 난 뒤에야 느껴진다는 점에서 후폭풍과 낙진을 닮았다. <오펜하이머>는 세계대전 시기의 국제정세, 불륜 등 다양한 레이어를 지닌다.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심리적 동력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고뇌에 빠뜨린 딜레마이다. 영화는 개별적인 시퀀스는 물론 전체적인 플롯의 구성에서마저 ‘후폭풍과 낙진’의 방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주인공의 죄책감을 가시화한다. <오펜하이머>가 한 편의 핵폭발이라면, 3막은 오펜하이머를 덮친 낙진과 같다. 무대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워싱턴으로 전환되며 정쟁이 본격화된다. 옳은 일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몇몇 사람들이 이념에 잠식된 난잡한 재판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영화는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메시지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지구의 이미지에 오펜하이머는 눈을 질끈 감는다. 2023년,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파멸의 연쇄작용은 여전하다. 3. “The world forever changes.” 포스터의 로그라인에는 인류 역사를 핵폭탄 발명 전후로 나누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인류는 여전히 핵무기의 자장 속에 있다. 트리니티 실험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적절한 평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지목한 파국의 원흉은 원자폭탄 자체가 아니다.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이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이전에도 인류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마주했다. 그보다 더 전엔 로스앨러모스에서 쫓겨난 인디언들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원폭 투하로 자립적인 독립에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강제 노역 중인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인피폭자의 수는 일본인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지도어 박사가 경고했듯, 폭탄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전쟁을 종식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 기관총이 발명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류는 수소폭탄을 비롯한 무한 군비 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오펜하이머>와 매우 유사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념 대립이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고, 미사일 폭격이 평화로운 구름의 이미지를 가로지른다. 극 중 나치 출신 무기 개발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말한다. “심판의 무기는 작은 원자력만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 230810 용산 언론시사회 1회차 230822 상암 메가박스 2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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