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맹

모텔과 나방
平均 3.5
솔직히 글 말미에 최다영 평론가님의 글을 보다가 전혀 새롭지도 않고 보다가 조금 나이브해서 답답해서 글을쓴다. 유선혜 시인의 시들이 좋은 이유는 젠더를 넘어서 세계와 존재 그리고 사랑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기때문이다. 뭐랄까 사랑을 안온하고 낭만으로만 생각하는 나이브한 시선이 비평에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랑 행위는 폭력이 없을 수가 없다. 고양이가 교미하는 모습을 봤는가. 목덜미를 앙 물고 교미를 한다. 그걸 교미로만 보고 싶지만 사랑으로 잉태하기 위한 사람도 그런 행위를 했다. 사랑은 누군가의 몸에 마음에 무언가를 새기는 일이고 그건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폭력적이지 않은 사랑은 연기일 뿐이다. 시인이 사랑에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고 하듯, 사랑과 멸종을 바꿔읽으라고 하듯. 왜 그렇게 이별이 아픈가. 왜 섹스는 처음엔 고통이지만 쾌락으로 치환되는가. 사랑이 낭만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런 폭력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배려와 대화들을 통해 여러 몸짓을 통해 사랑이라는 위해를 애정으로 치환하는 과정에 있음에 그 숭고에 있다. 왜 서로를 사랑해서 식인하는 이야기들이 낭만적일 수 있는 것인가. 시인은 사실 쉽게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그런 시를 써도 되었을 법 한데 자꾸 자문을 한다. 합의를 했었는데 저 이도 애썼는데 나쁜 사람은 없었는데 관계 자체는 나쁘지는 않았었는데 왜 혼자 남은 모텔방은 공허할까. 그건 폭력이 지나고 난 후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 폭력이 정말 위해를 가하기 위한 권력적인 폭력이 아니라 나름 평등한 관계에서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것으로 느껴지기에 기이한 것이다. 남자가 모텔에 나간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쁘지 않았고 농담도 건넸고 근데 관계 후 무언가 폭력을 저지른 것만 같은 그 기이함. 섹스 후 이 기이함을 넘을 수 있는 건 오래된 연인의 농담밖에 없다. 물론 이 하룻밤의 폭력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의 시도에서 일어난 무언가의 폭력이라고는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사랑은 이런 오염과 폭력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왜 소심한 남자들이 여자에게 말을 안 걸까. 그것 조차도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있어서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오히려 살아있다고 감각할 때 혹은 몸이라는 것이 느껴질 때는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이다. 시에서도 나의 몸을 자각하고 나의 젠더를 나의 나이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모두 폭력의 순간 그리고 폭력이 지나고 난 뒤다. 섹스할 때의 느껴지는 몸, 자해할 때의 몸, 섹스 후의 모텔, 따돌림 이후의 방과후 도서관의 공간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시인하고 있다. 학창시절 위험한 생각, 종말, 독버섯, 세계 멸망 등등. 요새는 작품들 중에서 안온하고 감상적인 포옹으로 세계와 존재를 덮는 결말들이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죽음과 불안을 전제로 깔아두고 하루하루를 기투해야하는 것인데, 그런 결말들은 당의정을 입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죽음과 같은 폭력을 도외시하지 않고 감수하고 나아가는 사랑이 더 낭만적이고 숭고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