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펴난처

펴난처

23 days ago

4.5


content

進撃の巨人

テレビ ・ 2013

平均 4.2

자유의 세상을 좇던 자가 세계의 한계에 쫓길 때. ㆍ ㆍ ㆍ (스포일러) ■[주제와 구조] 진격의 거인 세계관엔 정말 많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자기완성적 운명론, 자유의지, 복수의계승, 선악의붕괴, 역할과책임, 국소적구원 등. 제 각기 파고들면 논쟁이 끝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주제이지만 가장 큰 주제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정말 무책임할 정도로 간단하게 정의해버리는 "필연"이란 놈이다. 이 필연, 즉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인간세계의 한계성"이 곧 세계의 질서이자 모든 고통의 원흉이기 때문에. 필연은 자칫 모든 것이 영화필름처럼 완벽하게 정해진 장면을 따라간다는 운명론으로 이해되기 쉽상이지만, 진격의 거인에선 완전히 다른 뜻을 가졌다. 이 세계관에서 필연이란 인류의 몇%가 죽는다는 식의 디테일한 결과값의 운명이 아니라, 인류의 파국이라는 거시적 개념, 즉 "상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파국의 과정이 창조주같은 것이 아닌 인간 개인(에렌)의 선택으로 결정된다는 것, 그 선택이 자유의지임과 동시에 필연적이라는 것,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만화를 보며 세계관의 특정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땐, 만화의 대주제를 떠올리면 훨씬 연결짓기 쉬울 것이다. ■[구조의 노예, 노예의 자유의지] 에렌은 벽에 갇힌 현실에 억압을 느끼고 분노한다. 이 감정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증오다.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성향(공격적 자유 추구)을 따라 협소한 세상을 경험하고 반응하며 나아가던 에렌은, 그렇게 벽이라는 알을 깨부수고 또다른 벽(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며 운명적으로 깨닫고 만다. '나란 놈은 이 결말으로 매듭지어 지겠구나.' 오직 에렌 자신이기 때문에 도달하게 될 파괴적인 미래를 보고 만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면서도 자유의 신념을 놓지 않았기에, 수없이 분노하고 울분을 토하며 좌절해도 신념만은 굽히지 않는 에렌이었기에 노예인 유미르와 교감할 수 있었고 초월적 힘을 얻어 시간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지만, 에렌이 개척할 수 있는 자유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초월적 힘을 가졌다한들, 인간세계의 명확한 구조적 한계성까지 깨부수고 모두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는 혼자만의 자유가 아닌 '우리'의 자유까지 탐닉했다.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두마리 토끼는 불가능하지 않았는가. 결국 남겨질 이들에게 성화(盛火)처럼 건네는 자유 아래로 스스로를 매장하는 것이 최선의 자유라는 걸 알게 된 후, 그 과정을 실행에 옮김과 동시에 에렌은 눈을 감는다. 감은 눈은 곧 죽음의 수용을 뜻하면서도 최선을 선택했다는 안락함의 표현이기도 했다. 필연(고통)이란 구조 속에 그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구조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죽음 뿐일 테니. 죽음의 순간에 잠시 눈을 뜬 것이 과연 미카사 때문이었을까. 드디어 코 앞까지 다가온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 본능적으로 눈이 떠진 것일까. 그렇게 미카사의 칼날이 에렌의 목을 지나감과 동시에 무려 세 가지 자유가 파생된다. 1.고통의 구조를 탈피하는 에렌 2.맹목성의 구조를 극복하는 미카사 3.스스로를 복종적 사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미르 이 자유들이 뭘 의미하는 걸까? 이 자유가 그들 것일까? 에렌은 탈피한 것일까, 탈피된 것일까? 미카사는 극복한 것일까, 극복된 것일까? 유미르는 해방한 것일까, 해방된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구조와 한계는 필연이다. 필연 속에 있는 것은 노예다. 하지만 노예도 선택할 수 있다. 노예가 선택해 나가는 행위는 필연임과 동시에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는 곧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structure"이면서 "rescue"이다. 그들이 명확한 한계 속에서도 스스로를 구원해냈듯,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곧 삶의 의미이자 구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