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를 통해 톨스토이의 세계관을 밝힌
이사야 벌린 식 지적탐구의 결정체!
작가이자 사상가로 부각된 당대 지식인 톨스토이,
그의 처절한 고뇌를 다시 읽다
오늘날은 사유 결핍의 시대다. 사람들은 현란한 영상과 자극적이고 단순한 사실에만 열광할 뿐, 더 이상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거나 통찰력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죽음이 눈앞에서 도사리던 전쟁의 아비규환이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고 지나치게 발달한 기술문명이 편리함과 나태함을 선물한 나머지, 무엇이든 철저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던 인간 본연의 특징은 퇴화하고 만 것이다.
이런 시대에 지독하게 인간사에 대해 고뇌했던 한 인물을 소개하려 한다. 쉽고 가시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현시대에 경종을 울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거창한 수식어로만 소개될 뿐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인간 톨스토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톨스토이,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고슴도치와 여우》(강주헌 옮김, 애플북스)는 올해로 사후 100주년을 맞는 이러한 톨스토이의 일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한 철학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자 이사야 벌린이 뛰어난 분석력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톨스토이를 단순히 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저작 《전쟁과 평화》에 드러나는 사상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남긴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이 책의 대전제로 삼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 인간을 고슴도치형과 여우형으로 나누고, 이에 해당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언급한 뒤, 이 두 부류 어디에도 명확하게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톨스토이의 특징과 그의 성향을 분석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슴도치형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고, 여우형은 서로 모순되더라도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단순한 사료를 바탕으로 톨스토이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장편소설을 분석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당대의 세력가들에 의해 왜곡되는 그릇된 기록들을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 숨 쉬는 평범한 주위 인물들의 세세한 이야기가 실제 역사이며, 그것이 얼마나 거칠고 생동감 있으며 그 안에 수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모습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사건과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서사방식을 통해 역사를 설명하려 했다. 자신의 역사관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인 이사야 벌린 역시 다른 사료보다 이 소설이 톨스토이 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이를 바탕으로 당대의 실상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등을 설명한다.
이러한 독특한 접근법을 통해 저자는 결국 톨스토이가 다양한 현상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타고난 여우일 거라 잠정적으로 판단한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가 완벽하게 인간을 분류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저자 역시 인식하고 있기에, 톨스토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보다는 한발 물러나 자신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전하기만 한다. 그러나 인간사를 꿰뚫는 공통된 대전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평생 이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여우적 성향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톨스토이의 일생을 볼 때, 그의 이분법적 판단에도 일리는 있다.
우리는 《고슴도치와 여우》의 이러한 내용을 통해 종교적 성향이 강하고 수많은 명저를 남긴 작가로만 알던 톨스토이의 인간적인 고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역시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떤 것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 지식인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온 문명세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다.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또한 이 책은 메스트르, 루소, 투르게네프 등의 사상과 톨스토이를 비교하며 당대의 지식인들이 가진 특징과 그들의 맹점을 짚어보는 기회가 된다. 무엇보다 인간 톨스토이를 자세하게 분석해낸 또 다른 여우, 이사야 벌린을 통해 우리는 톨스토이의 새로운 면모를 깨닫고 역사라는 결과론적 대상에 대해 의미 있는 의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