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수전 앤서니, 그림케 자매 등 억압과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역사의 한 장에 씌어진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에게 가해진 것을 억압이라 말하지 못한 채 내밀한 억압으로 시들어 간 여성들이 있다. 앤 존스(Ann Jones)는 이 시들어 간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며, “압제를 걷어차고 나쁜 결말을 맺는 평범한 여자에 관한 여자의 역사책을 쓰겠다”고 말한다. 여성과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사회의 부당함을 영속화하는 역사, 사회, 정치적 구조에 관해 써 온 저자는 사 년간의 연구 끝에 1980년 『살인하는 여자들(Women Who Kill)』의 초판을 출간했다. 미국의 긴 역사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여자들을 그 구조적 원인과 함께 살펴보는 이 연구서는 사회 기저에 깔린 여성혐오와 그로부터 구성된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어떻게 범죄가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 범죄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는지를 첨예하게 제시한다.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불평등과 차별, 여성혐오의 문제가 꾸준히 논쟁에 오르는 지금, 이곳의 우리가 당면한 주제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부터 이십세기까지 사 세기에 이르는 시간을 톺아보며 저자는 억압의 체계를 분석하고, 여성의 불평등한 삶 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유형을 서술한다. 술에 취해 낯선 사람과 드잡이를 하다 칼로 찌르거나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남편과 연인, 아이와 같이 친밀한 사이의 사람을 죽인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살인 사건들은 너무나 다르고, 너무나 예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화적 기형의 그림자’다. 자극적으로 부풀리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최대한 많은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여성과 사회, 살인의 연관성을 검토함으로써 저자는 사회 구조의 모양을 분명하게 그려내 보여준다.
불평등한 제도와 구속에서 비롯된 참극
본문은 시대순으로 흐르는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장 「미국을 세운 어머니들: 여러 음란한 여자들」에서 저자는 식민지 시기 남자와 동일한 노동으로 국가를 건설했으나 살인자가 된 여자들을 그린다. 이 시기의 여자들은 주로 혼외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살해했는데, 이는 혼외 출산을 한 하인의 고용 기간을 늘림으로써 그 주인으로 하여금 혼외 관계를 유리하게 사용하도록 조장한 법에 의해 생겨난 문제였다. 혼외아를 몰래 없앤 여자들은 그 영혼을 살해했다는 종교적인 믿음 아래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를 통해 법 자체가 조장한 사회적 구조는 은폐되었다. 이렇게 은폐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여성의 지위는 나날이 하락했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시민권을 소유하지 않게 된 ‘여자’는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되어,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숙녀’가 되었다.
두번째 장 「가정의 참극」은 미국 독립전쟁 이후의 시기 바로 이 숙녀들의 이야기다. 결혼 후 외부와 분리된 채 과하게 보호된 숙녀들은 곧 소유권, 양육권, 그리고 투표권을 잃게 되었는데, 이에 저항한 많은 여성 단체들은 남자들, 즉 ‘사회의 아버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힘으로 여자들을 억압했고, 이에 맞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독을 먹였다. 그러나 권리를 잃은 여자들은 그 자체로 남자들에 의해 무구한 여성성으로 보호되었기에 풀려났고, 이는 결혼이 ‘신의 제도’라는 가정의 신화를 공고히 할 뿐이었다. 그리고 구속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여자들은 계속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독살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저임금과 완화되지 않는 이혼법, 여자들에게 교육과 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겨난 예상 가능한 산물이었다.
법의 바깥에서 재판받는 사건들
3장 「처녀 망치기」의 여자들은 자신을 ‘유혹’한 뒤 버리고 떠난 ‘유혹자(seducer)’들을 죽인다. 이러한 여자들은 줄곧 정확한 증거가 아닌 도덕적 충격에 의한 정신 이상, 심지어는 비정상적인 월경을 이유로 변호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유혹당해 버려진 경험으로 미친 여자가 자궁의 교란으로 악화되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를 이해한 판사와 동정적인 여론은 살인을 저지른 여자들을 무죄로 풀어 주었다. 그리고 법이 아닌 감정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됨으로써 어린 여성들을 성적으로 약탈한 남성에 대한 법의 논점은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법에 대한 논쟁은 4장 「법과는 무관하게」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저자는 여성이 같은 성별의 배심원에 의해 재판받아야 할 권리를 논의하는데, 실제로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배심원들은 한편으로는 여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한 평결을 내렸다. 법을 내려놓고, 법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재량권으로 살인을 저지른 여성들을 단죄한 이들이었다. 이 장을 대표하는 사건은 1892년에 일어난 유명한 도끼 살인마 ‘리지 보든(Lizzie Borden)’의 사건인데, 같은 시기 고용인을 죽인 하녀 브리짓 더건(Bridget Durgan)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으며 교수형에 처해진 것과는 상반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올바른 숙녀가 부친을 살해한 혐의를 인정하는 것은 가부장제 자체에 대한 공격이 되었기에 리지 보든은 판사와 배심원들, 즉 다른 가부장들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선정적 살인과 죽이는 여자들
5장 「그게 교훈이 되도록」에서는 이십세기에 이르러 주목받게 된 여성의 권리 중 하나인 성적 해방과 여성의 살인 사건이 교차된다. 여성의 성적 자유가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른 이 시기에 사람들은 살인하는 여자들을 성적인 편견, 선정적인 시각과 함께 바라보았다. 저자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루스 스나이더(Ruth Snyder)와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앨리스 크리민스(Alice Crimmins)의 사건을 대표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서 주목받은 것은 살인 자체보다도 두 여성의 성적인 생활이었다. 당시의 신문들에서는 그들의 사생활을 자세히 보도했고, 스나이더와 크리민스는 점점 더 ‘나쁜’ 여자가 되어감으로써 그들을 처벌하는 일이 곧 사회의 교훈을 제시하는 일이라는 명목하에 일종의 도덕적 기준을 정립하는 데 동원되었다. 특히 크리민스의 경우 경찰들은 살인의 증거를 수집하기보다 크리민스의 성생활을 녹취했고, 그녀가 ‘그런 여자’라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오명에 대한 크리민스의 발언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그릇된 사회의 교훈이 되어 버린 여자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고 있다. “과거에 당신들이 나한테 했던 일 중 어떤 것도 (…)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일 중 어떤 것도 (…) 그리고 미래에 나한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도,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되었던 육 년 전에 나한테 저지른 일보다 더 나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난 당신들 모두가 나한테 저지른 거짓과 음모를 세상이 보게 되기만을 그저 바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매 맞는 여성 증후군과 정당방위의 현실
6장 「여자 부수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회에 만연한, 가정 내 여성에 대한 학대이다. ‘매 맞는 여성 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으로 요약해 볼 수 있는 이 장에서의 살인 사건들은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그려진다. 신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찰들로부터 여자들은 무기력을 학습한다. 그리고 오랜 학대에 시달린 피해자가 그 마지막 선택으로 학대자를 공격했을 때 이에 대한 변론으로 이 증후군을 제시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초판에는 없었던 마지막 장 「여자들의 권리와 잘못」은 1981년 페이퍼백을 출간할 때 덧붙인 후기에서 출발해 1996년 다시 책을 내면서 하나의 장으로 확장되었다. 저자는 새로운 사건은 여성에 대한 압제와 부당함이라는 면에서 미국사의 새로운 국면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아내 구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나. 저자는 학대받는 여성을 위한 피난처가 늘어 감에 따라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살인 사건이 줄어든 것과 달리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