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평전

김삼웅
3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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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 등 이 분야에 대해 40여 권을 집필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오늘날까지 온갖 루머와 억측에 둘러싸여 있는 몽양 여운형을 재조명하였다. 저자는 여운형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싸웠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이 책은 여운형의 삶을 아주 가까이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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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왜 나는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는가 1장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의 위치 2장 파란곡절의 어린 시절 3장 청년시대, 기독교 전도와 국민계몽운동 4장 중국유학 통해 역사의식 깨우치다 5장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터전을 닦다 6장 임시정부의 산모 그러나 외곽으로 밀리다 7장 일본열도에 일으킨 태풍 8장 고려공산당에 참여 활동하다 9장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10장 중국혁명에 참가해 북벌에 나서다 11장 국내로의 압송, 3년의 옥고 12장 언론계 투신,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 13장 일제 말기의 시련과 건국동맹 조직 14장 해방정국을 주도하고 고립 당하다 15장 창당과 좌우합작 그리고 김일성과 만남 16장 좌우합작 시도 끝에 암살 당하다 17장 민족의 지도자, 여운형을 돌이켜 보다 저자의 한마디 주 사진 출처 목록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진보적인 민족의 지도자, 여운형을 다시 보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 등 이 분야에 대해 40여 권을 집필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오늘날까지 온갖 루머와 억측에 둘러싸여 있는 몽양 여운형을 재조명하였다. 저자는 여운형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싸웠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필요에 따라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넘나들며, 적도에서도 거침없이 조선 독립을 요구하고 싸웠다. 광복 이후엔 좌우합작을 위해 누구보다 힘쓴 인물이었다. 하지만 목표 지향적인 여운형의 대담한 행보가 훗날 그를 기회주의자, 친일파라는 오명을 갖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여운형의 삶을 아주 가까이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냉전 시대는 종결을 선포했지만 휴전국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이념 대립이 심각하다. 서로 간의 이해 없이 갈등과 비난만으로 얼룩져 있다. 사실 이념 간의 갈등은 언제든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대립각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던 과거의 시절, 이를 넘나들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바로 여운형이다. 그는 시대에 한발 앞서 민족의 미래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척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 곁에는 늘 시기가 뒤따르는 법. 그의 앞길에는 걸림돌이 많았고 폄훼와 모함도 적지 않았다. 우파는 그를 좌파라고, 좌파는 우파라고 했으며 때로는 중도파 또는 기회주의자라며 따돌림 되었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다 보니 친일파로 오해받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기에 의도에 따라 그를 좌경 이념으로 색칠하고 일제 말기 반민족행위자로 낙인하려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여운형을 특정한 이념의 따옴표로 분류하기에는 활동 영역과 무대가 너무 넓고 그 그릇이 커서 쉽게 묶이지 않는다.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일제에 짓밟힌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 여운형에게 타협은 있어도 원칙을 깨는 일은 없었다. 여러 집단을 넘나들었지만 그는 친일파도 중화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친소주의자도 아니었다. 오직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이런 그를 저자는 단호하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는 이렇게 이념과 사상보다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험난한 길을 걸었던 여운형을 만날 수 있다. 격동의 시대, 다양한 이념과 인물들을 편견 없이 만났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나보자. 시대를 앞서 나간 진보적 독립운동가 손기정의 일장기를 처음 말소하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일장기 말소 사건.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이를 『동아일보』보다 먼저 시행한 것이 바로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을 당시였다. 사건이 터진 뒤 그는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신문사를 폐간시키는 길을 택한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참으로 담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늘 비굴함이 없이 당당했다. 오직 자신의 굳은 신념과 목표 아래 정진해 갔기에 그의 행보에는 항상 ‘첫 번째’라는 표현이 붙었다. 가장 먼저 근대적인 정당을 창당하고 가장 먼저 3·1혁명 추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복 직후엔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첫째로 꼽혀, 미군정의 극비 보고서에는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늘 한발 앞서 독립운동을 개척해 나아갔다. 국내외를 막론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여 러시아 혁명 대표들을 만났고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의 권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의 초청에 응해 고위 정객들을 만나, 총독부 고위층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모든 집단이 각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그와 만났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상대가 어떻든 여운형은 절대 위축되지 않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조선 독립을 외칠 뿐이었다. 뛰어난 지식과 웅변실력을 갖고 있던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세력도 많았지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조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했다. 당시 상황과 연관 시켜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과감한 행보였다. 훗날 셀 수 없는 테러와 암살 위협에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민족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수맥에 흐르는 정신은 진보적 민족주의였다. 정관매진正觀邁進. 즉 ‘바르게 보고 힘써 전진하라’는 뜻이 담긴 휘호를 그가 즐겨 썼던 데서도 읽을 수 있듯 그의 사상은 늘 곧았으며 강직했다. 이런 생각을 기저에 두었기에 조선 독립, 좌우합작이라는 목표를 두고 담대하게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여운형은 살아있는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운형의 행보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우리는 전쟁 후유증과 이념 대립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민족을 향한 애정이다. 여운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그것이었다. 그가 우무학당에 재학하던 시절 가정의 불행이 잇따라 찾아왔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해 아내가 사망했다. 몇 년 뒤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마저 사망하게 된다. 그에게 닥친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해 을사늑약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곧이어 홍화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을 가르치던 민영환마저 자결하게 되어 그가 채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가족과 조국을 잃은 슬픔에 아버지가 먼저 생을 마치게 되었다. 가족과 조국을 모두 잃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조국은 가족과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혈농어수血濃於水’ 그러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뜻이 담긴 항일독립투쟁 이래 그가 지켜왔던 휘호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피를 나눈 가족 같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 말고는 모든 것이 곁가지에 불과했다. 우리 시대에 과연 그와 같은 인물이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가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말하듯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과 외교정책에 휘둘려 갈피를 못 잡고 있고 해방 후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의 대한민국도 결코 국민이 행복할 수만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 사람들이 폄훼하는 그의 이념을 넘나드는 행보, 그중에 특히나 일본의 초청으로 적도인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와 언론, 학계 인사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열변을 토하며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던 그를 보면 현시대에도 여운형과 같은 굳은 신념과 담대함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그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워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졌으면 한다. 여운형이 그랬던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극에 치달은 이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의 ‘민족주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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