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모든 이미지와 느낌이 형성되고 연결되는 그곳, 마음의 풍경을 극사실적으로 담아내는 오스트레일리아 문학의 거장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내 글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 일흔여덟 살의 이 노벨상 경쟁자는 마치 시계공처럼 글을 쓴다. 각각의 문장이 미세하게 다듬어진 톱니 같고, 각각의 책은 정교한 기계 같다. ─ 《오스트레일리언 북 리뷰》 ▶ 제럴드 머네인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이제까지 배출한 작가들 중 가장 독창적이다. ─ 《오스트레일리언》 ▶ 마르셀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그가 추구하고 분류하는 이미지들의 구체성은 그 자체만의 쾌락을 가져다준다. 그의 글쓰기가 자아내는 효과는 이미지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이 인간의 마음속에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 《가디언》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중 가장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숨은 거장 제럴드 머네인의 소설선 『소중한 저주』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평생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난 적이 없고, 출생지인 빅토리아주 바깥도 거의 벗어난 적이 없다는 이 은자(隱者)와도 같은 작가는 그럼에도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현미경적인 관찰, 문학에 관한 수도사와도 같은 엄숙한 탐구, 인간 의식과 마음에 관한 정교한 기술(記述)을 바탕으로 보편성을 획득하여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거장이다. ■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과 세상의 끝, 문학이라는 사고(思考)의 지형을 맴도는 걸작 한 이름 없는 작가는 자신의 책장을 살피며 수십 년 후의 미래, 말하자면 2020년에 자신의 집에 서 있는 한 모르는 남자를 상상한다. 수년 전에 그 남자는 작가의 아직 집필되지 않은 소설책들을 샀지만, 그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미래의 화자인 작가는 서글프게 말한다.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내 글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소중한 저주」 중에서) 제럴드 머네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실로 독특한 경험이다.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모두 지극히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것들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공간의 지형과 위치와 방향을 해부학적으로 꼼꼼하게 기록한다. 「하천 체계」, 「몇 나라들이 있었다」, 「에메랄드 빛깔 푸른색」, 「소중한 저주」 같은 작품들에서 그런 기록들은 주인공이자 화자의 내면의 지형으로 이어진다. 머네인이 궁극적으로 그려 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풍경, 곧 ‘마음의 지형’이다. 머네인의 ‘픽션’(그는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 같은 단어보다 ‘픽션’이라는 말을 고집한다.)은 ‘실재’하는 장소들과 맞닿아 있고 같은 좌표를 공유하고 있으나 실은 다른 차원, 즉 ‘마음의 지형’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담았다는 점에서 실로 독특하다. 문예 창작 교수로서의 경험을 그린 「아득한 들판에서」의 화자는 실제 지도와 마음속 이미지를 그려 낸 도해 사이의 유사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마음은 이미지와 감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나는 내 마음을 많은 해 동안 연구해 왔고 그 안에서 이미지와 감정만을 발견했다고, 내 마음의 도해는 이미지가 작은 소도시로 표시되고 감정이 소도시 사이의 풀이 무성한 전원 지대를 지나가는 도로로 표시된 방대하고 정교한 지도와 닮았을 거라고, 나는 이어 말했다.” ■ 의식의 흐름과 이미지의 좌표를 따르는 고독한 여행자 머네인은 1939년 호주 멜버른의 교외 도시인 코버그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열여덟 살에는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주 후에 학교를 자퇴했으며, 몇 년 후에는 가톨릭 신앙을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신앙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계 이외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머네인에게 “일상적 세계와 이상적 세계는 상호적 긴장 속에서 유예되고 서로 존재하도록 지탱한다.”(J. M. 쿳시) 이 소설집의 화자로 등장하는 이름 없는 남성은 단조로운 어조로 평범한 일상과 독서와 글쓰기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독백처럼 늘어놓는다. 마치 ‘의식의 흐름’이나 ‘자유 연상’처럼 보이는 머네인의 픽션은 사실 정교한 패턴과 리듬을 갖추고 있다.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느리고 반복적이며 특정한 플롯을 갖추지 않은 서술은 이 같은 패턴과 리듬을 통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닌 기억과 인상, 이미지를 환기한다. 예를 들어, 「하천 체계」에서 화자는 한 수역을 설명하면서, 현재 위치까지 다다르기 위해 거쳐 왔던 지형과 방향을 자세히 설명한다. 두 개의 수역 중 한 수역은 뒤틀린 심장 모양을 연상시키고, 그것은 어린 시절 고모의 방에서 들여다보았던 장신구 카탈로그 속 목걸이 펜던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두 수역이 연결된 전체 모양은 처진 콧수염을 떠올리게 하며, 그런 콧수염을 지녔던 아버지의 아버지와 연관된 이야기로 연결된다. 얼핏 여러 갈래로 흘러가는 물처럼 정처 없이 전개되는 듯 느껴지는 서술은 이런 이미지의 겹침과 연상, 그리고 그에 연결된 사건과 기억에 의해 느슨한 통일성과 고유한 패턴을 갖춘 화자의 마음속 풍경을 드러낸다. 지형과 풍경이 끊임없이 변화하듯이, 화자의 마음속 지형과 풍경 또한 고정되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아득한 들판에서」 첫 부분에서 화자가 학생에게 설명하듯이, 그가 하나의 이미지에 대해 쓰고 있을 때 또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것의 연결성과 확장성이 그 세세한 모습을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머네인에게 글쓰기란 마음속 이미지들과 그것 사이의 연결성,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감정들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상 속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이십 대 초반까지 그의 삶을 지배한 가톨릭 신앙, 첫사랑과 스쳐 간 여성들에 대한 기억, 경마, 독서와 글쓰기, 평생을 살았던 멜버른과 변두리의 외롭고 황폐한 지형, 은둔자적 삶과 ‘여성 현전’에 대한 욕망 사이의 진동을 담고 있다. 자신이 ‘진정한 픽션’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보고서’를 쓰는 머네인은 자신의 작품이 지닌 특이성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방식의 픽션을 제대로 읽어 줄 ‘이상적 독자’를 기대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첫 작품 집필할 때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독서와 글쓰기는 무한히 복잡하고 다채로운 경험이라는 걸 알기에, 자신은 도저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픽션을 쓸 수 없었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독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글쓰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머네인의 화자의 이상적 독자는 실재하는 사람이 아닌 ‘이미지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그가 ‘마음속 얼굴,’ ‘여성 현전’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조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의 화자가 말하듯이 “글쓰기란 비가시적 존재들이 가시적 존재를 매개로 하여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는 일종의 기적”이지만, 그의 전언이 그녀에게 가닿고 그녀의 전언이 그에게 도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머네인의 화자들은 수십 년 후에는 완전히 잊힐 수도 있을 그들의 글의 운명을 슬퍼하고(「소중한 저주」), 글을 쓰기 위해서 자신과 자기 글의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채석장」),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음에도 자신이 홀로 좁은 방에 사는 독신이라고 상상한다. 「조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이 사는 농장과 같은 위도에 위치한 어느 섬에 사는 한 여인이 써 보냈을 법한 전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은 슬프고 처연하다. 그럼에도 화자가 존재하지 않는 조카에게 일련의 글을 써서 고립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듯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 좋은 결과가 생겨나기를 기대하듯이 머네인은 머나먼 곳의 독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다가가는 독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