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죽음을 詩로 쓰면 어떻게 될까? 죽은 자를 애도하여 지은 시를 만시挽詩라 한다. 이생을 떠난 이를 기림으로써 그에 대한 글을 남기는 것이 조선시대에는 당연한 예의에 속했고 그것이 만시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산 자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은 만시의 또다른 핵심이 될 것이다. 오언절구나 칠언율시로 씌어진 만시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장편으로 길어지기도 하고 슬픔의 자취를 감쪽같이 없앤 단형구로 남기도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엔 권세가가 돌아가면 문전에 만시가 수북이 쌓일 정도로 흔해서 만시들이 모두 심금을 울리는 명문장은 아니었다. 조선중기의 대문장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대충 격식에 맞춰 쓴 의례적인 만시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기 며칠 전 간결하게 자만시自挽詩를 지었다. 어떤 만시는 밋밋한 반면 또 어떤 시는 글이 힘이 있고 애절하다. 그런 차이는 만시를 지은 이가 문학적 탁월함을 갖췄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기도 하고, 또 죽은 이에 대해 통절한 심정을 얼마나 내면에 깊게 쌓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 책에 소개되는 만시들은 지난 20여 년간 조선시대 시문학을 전공해온 저자가 문학적으로 뛰어난 명편만을 골라 엮고 그 역사적 유래와 미학적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감정을 꾸밀 새가 없었던 이들의 속내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슬픔이 직설적인 화법으로만 다뤄진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산운 이양연이 둘째 아들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에는 ‘슬픔’이나 ‘눈물’ ‘아픔’ 같은 시어들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문을 들어서려다 다시 나와서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대네. 남쪽 언덕엔 산 살구꽃이 피었고 서쪽 물가엔 해오라비 대여섯 -「슬픔을 피하려고□悲」 ‘타비’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슬픔을 피하고자 지은 까닭 때문인지, 이양연은 슬픔을 말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풍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풍경에 떠넘겼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게 언어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있다. 17세기의 시인 이명한이 처남 박미의 상을 당하여 읊은 만시 역시 희망과 편안함을 드러내며 산 자의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독특한 시이다. 처남이 죽었건만 저승에 가서 먼저 떠난 자기 부인을 만나면 안부 좀 전해달라는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심노숭의 저 유명한 「누원淚原」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에는 당연히 눈물과 슬픔이 뒤따른다. 자하 신위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예禮를 잃기도 했고 김상채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상심한 이후로 마음을 가누지 못해 몸도 쇠하여지고 병도 깊어졌으며 슬픔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이어져만 갔다”며 만시를 지어 남겼다. 반면 이건창은 아내를 떠나보내고 난 후 슬픔이 희미해졌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죽음의 비애스런 순간은 다양한 문장으로 드러난다. 이 책에 소개된 죽음을 포착한 35편의 시를 통해 독자들은 조선 한문학의 유려한 미학적 순간들을 새롭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산문이 드러낼 수 없는 시의 묘미 옛사람들이 남긴 문집을 보면 시를 비롯하여 편지글, 제문, 묘지문, 행장, 전傳, 논설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글이 실려 있다. 죽은 이를 위해서는 흔히 지어진 것들이 제문, 묘지문, 행장이다. 하지만 만시는 이러한 산문과는 구별된다. 살아남은 자는 쉬이 잠잠해지지 않는 심정을 구구절절 산문으로 옮겨 적을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는 울컥하는 심정을 한번 삭였다가 그것을 절제된 언어로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가령 삼당시인 이달李達(1561~1618) 이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만시는 유독 우아하고 서정적이다. 먼지에 거미줄을 손에 만져질 듯이 제시했고 복사꽃과 닫힌 문을 겹치게 놓아 심리적 단절감을 강조했다. 그것은 안개와도 같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덮는다. 은은해질 때까지. 화장함엔 거미줄, 거울엔 먼지 일고 닫힌 문에 복사꽃 핀 적막한 봄이라 예전처럼 다락에 밝은 달은 떴건만은 그 누가 있어 저 주렴 거두어줄까 - 이달이 「죽은 아내를 슬퍼하며悼亡」 또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300여 수의 시를 남겼던 천재적 시인 김숭겸을 기리기 위해 김창흡은 시를 지었다. 그는 산문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조카가 시를 목숨보다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시로서 마지막 길을 전송한 것이다. 몇 줄의 글로 살아남은 자의 심사를 적기엔 부족했던 탓인지,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던 겸재謙齋 조태억은 아들의 죽음을 10수나 되는 연작시로 남겼다. 누구를 대상으로 했나? 만시는 아내를 위해 지은 도망시悼亡詩, 친구를 위한 도붕시悼朋詩, 먼저 간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 외에 스승과 제자, 선배,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위해서 지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린 자만시自輓詩도 있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마음을 드러내놓을 수 없던 처지였는데, 예외적으로 아내가 저세상으로 떠나갔을 때 지었던 도망시만큼은 체면이고 위엄이고 다 내려놓고 마음껏 통곡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중 추사가 아내 잃은 심사를 적은 것은 도망시 중에서도 압권으로 꼽힐 만큼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추사는 생전에 수많은 난을 쳤듯이 아내의 삶과 죽음이 마음에 여러 굴곡들을 남겼음에도 힘겹게 천천히 따라가면서 난을 치는 심정으로 극복해냈을지도 모른다.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유배지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만시를 짓다配所挽妻喪」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자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아내가 아픈 뒤부터는 더욱 자주 보냈다. 약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아예 드러누웠다는데 그렇게 아픈 것인지 등 걱정이 끝이 없었다. 결국 아내는 지병이 악화돼 죽었지만 추사는 그것도 모르고 그 다음날 편지를 썼고, 그 후로도 한달 동안 답장을 기다렸다. 위의 시는 한달 뒤에야 아내의 죽음을 전해듣고 원통한 마음에 나 죽고 그대 죽어 이 원통함 알게 했으면 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자하 신위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었듯이,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에서 “가슴에 매실이 든 것처럼 시큰거린다”는 시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오래 지속되며 앙금처럼 남아있는 현실을 경험적으로 잘 호소하고 있다. 눈물을 참는 것이야 이젠 어렵지 않소만 이 인생 몇 번이나 기쁨과 슬픔 겪을는지 가슴속엔 푸른 매실이라도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오래도록 시큰해져오는구려 조선시대의 만시 중에선 독특한 느낌을 주는 것도 많다. 그중 하나가 남의 슬픔을 대신해서 지은 대인작이다. 조선중기 당시풍의 시로 명성을 날린 백광훈이 지은 「남을 대신해서 지은 만시」는 누군가가 부탁하여 그 심정을 대신하여준 것이지만, 본인이 당한 일처럼 느껴질 만큼 그 내용이 비감하기 짝이 없다. 그 옛날 집엔 고운 먼지만 가득하고 새 무덤은 얼었고 길은 멀기만 하오 백년해로 하자던 약속의 말만 남긴 채 수없이 흐르는 눈물에 부쳐서 보낼 뿐이오 -「남을 대신해서 지은 만시挽代人作」 또한 가장 독특하게 주목해볼 만한 것이 소위 자만시다. 이 책에서는 총 3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택당 이식은 죽기 꼭 20일 전에 병상에 누워 시를 받아적게 함으로써 자만시를 남겼다. 산운 이양연 역시 한 편의 자만시를 남겼는데, 짧지만 한평생의 시름이 그 안에 모두 담겨 있다. 한평생 시름 속을 지나다보니 밝은 달은 봐도봐도 만족치 못했는데 이젠 길이길이 대할 것이매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지는 않으리 이처럼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인생들이 모두 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