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조선을 사랑한 죄로 추방당해야 했던 일본 시인 우치노 겐지의 첫 ‘발간 금지’ 시집 『흙담에 그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종의 유화적 제스처로서 일제의 ‘문화 통치’가 진행되던 1921년의 식민지 조선. 20대 중반의 문학청년 우치노 겐지는 철로 개발과 연계된 계획도시로 성장 중이던 대전에 도착, 대전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대전에 온 후 일 년 뒤에 그는 문학결사 ‘경인사’를 결성하고 당대 한반도 문학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시가 전문 잡지 『경인』을 창간합니다. 일찍이 조선에서 일하던 부모님의 권유로 온 곳이지만 처음 그의 눈에 비친 한반도는 일제의 국토 개발로 인한 삭막한 식민지 풍경과 수입 문화, 그리고 외지인으로서는 익숙치 않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가 어우러진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보는 광경을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보게 되었고 그 안에서 황량한 세계를 극복해내는 사람들의 생명의 힘에 감탄과 존중을 느끼며 이를 시어로 승화시키게 됩니다. 1923년이 되자 그는 지난 2년여 동안의 문학 활동을 결산하는 첫 시집 『흙담에 그리다』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흙담에 그리다』에 발간 금지 처분을 내립니다. 한반도 문학의 잊혀진 미지의 작가 제국주의와의 평생의 싸움을 시작하다 『흙담에 그리다』에는 문화 통치 중인 일제가 자국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발간 금지를 명령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할 정도로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선 『흙담에 그리다』는 일본어로 쓰였지만 조선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어와 한국어가 함께 쓰이며 당대 조선의 풍광을 모던한 언어로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긴 하지만 이 부분만 보면 총독부 입장에서는 수용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치노 겐지 본인이 가장 공을 들였을 장편시, 책 제목과 같은 표제시인 ‘흙담에 그리다’가 그들의 심기를 정면으로 건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한반도의 풍광은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과 연결되고, 깨달음과 행동에의 독려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총독부는 『흙담에 그리다』의 발간을 금지시킨 후 이 시를 집중적으로 지적하며 우치노 겐지의 계속된 항의에도 불구하고 삭제를 명령합니다. 이 사건은 우치노 겐지 본인에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그는 이후 경성을 거점으로 재조일본인과 조선 문인들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학 활동을 전개합니다. 잡지 창간, 문학 모임 결성, 전시회 개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그를 조선총독부는 계속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1928년에 교사직에서 파면되고 환송회조차 허락되지 상태로 조선에서 추방당합니다. 경계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문학 체험이자 역사적 기록 『흙담에 그리다』의 국내 최초 완역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쫓겨나야 했던 우치노 겐지는 도쿄로 적을 옮긴 후에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기는커녕 더 날카롭게 세웁니다. 그는 조선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가다듬은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조선어를 그대로 쓴 『까치』로 짓습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작가 아라이 데쓰라는 필명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는 평생의 문학 활동을 쉬지 않고 진행합니다. 그런 그를 일제는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체포와 구금, 고문으로 박해하게 됩니다. 『흙담에 그리다』는 우치노 겐지의 작가적 시작이자 일제 문화 정책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인 동시에 당대 한반도 문학의 이색적이고도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독특한 시어를 구사하며 향토문학적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풍광의 묘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행동주의적 사상을 전개하는 점, 그리고 아직 젊은 시절의 작가다운 탐미적 색채가 한국과 일본의 향토적 소재들과 어우러지는 모습 또한 『흙담에 그리다』가 가지는 특별한 면모이기도 합니다. 시를 통해 한반도 문학의 큰 풀을 만들려던 이채로운 작가, 세계를 간파하면서 이상을 꿈꾸게 된 우치노 겐지가 본 시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