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과 친구들이 여는 근대적 주체 ‘나’의 계보
이 책은 근대적 주체 ‘나’가 탄생한 바로크를 무대로 햄릿과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사유와 예술의 여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려보인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은 자신의 친구들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바흐의 베드로, 렘브란트, 데카르트, 몽테뉴, 파스칼, 세르반테스, 밀턴, 피프스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경험한 17세기 서양 지성사와 문예사의 순간들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햄릿과 친구들은 기독교적 사유와 세속적 근대의 요소가 팽팽하게 맞서던 바로크의 시대적 긴장을 고스란히 겪어낸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안주해 손쉬운 대답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에너지를 동력 삼아 의심과 회의로, 사유와 독백으로, 또는 글쓰기와 자화상을 통해 ‘나’라는 새로운 근대적 중력을 열어낸다. 이들이 역사의 전환점을 통과하며 일구어낸 사유와 예술 저변에는 인간을 이상화한 르네상스의 미덕이 붕괴된 흔적이 남아 있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믿음과 구원이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이전되던 당시 사회의 풍경과 통증이 자리하고 있다. 햄릿과 친구들이 이러한 흔적과 통증 위에 세운 ‘나’는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끝까지 미완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존재의 근거로 긍정하고, 계속 변해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까지 삶을 이어가는 근대적 주체 ‘나’의 계보를 구축해나간다.
종교와 세속이 빚는 불협화음의 서막, 바로크
바로크는 세속적 근대의 요소들 대부분이 태동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믿음과 영성, 영혼, 구원, 심판, 내세 등 기독교적 사유방식 또한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시대였다. 정치, 경제, 과학, 철학, 예술,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진행되는 한편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개인적 신앙 체험도 열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바로크’의 가치는 서로 대립각을 이루는 이 두 축 간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나아가 이 갈등과 모순, 괴리를 봉합하지 않고, 대립의 양태를 그대로 사유하고 형상화하면서 ‘나’의 주관적 시각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와 입장, 전략 속에 놓여 있다.
파노프스키는 바로크 시대를 두고 “르네상스 유산에 생긴 균열과 갈등을 직시하고 극복하고자 한 용기 있는 시도들”이라고 말했다. 그 동력은 아마도 주관적 에너지, ‘나’의 역동성에 있을 것이다. 바로크의 ‘나’는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처럼 자신을 초월하는 힘, 바람의 동력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바람은 갈대 속에 살아 있다. 햄릿과 친구들의 지난한 여정은 갈대와 바람을 동시에 보고 듣는 이중성과 긴장의 유산을 체득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햄릿의 ‘독백’을 ‘변주’하는 창조적인 시도들
햄릿은 존재와 구원, 죽음, 내세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종교개혁 이후 ‘나’의 고뇌와 번민을 ‘독백’의 형태로 표현하고 사색한다. 의혹과 불안이라는 근대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오르페오의 ‘독백’은 신들과의 계약에 대한 회의와 의혹으로 넘쳐난다.(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 유리디체가 정말로 뒤에서 따라오는 걸까 내내 의심하던 오르페오는 결국 그 의심 때문에 유리디체를 잃고 만다. 한편 데카르트에게는 이러한 의심이 ‘나’를 확인하는 긴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내가 의심하는 순간, 의심의 능력을 갖춘 ‘나’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이러한 ‘나’는 물론 완벽한 이성적 주체는 아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허상이고 허위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햄릿의 독백을 글쓰기의 형태로 이어간다. 그가 발명하고 명명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에세’는 ‘나’의 불명확함, 불안정성, 가변성, 모순 등의 바로크적 증상을 글로 추적하는 탐색의 시도이다. 글로 쓴 자화상, 몽테뉴의 『수상록』(원제는 ‘시도’라는 뜻의 ‘에세essai’)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글은 없듯,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 어떤 것도 결정판이 아니다. 그가 그린 자화상들은 시간의 흐름을 얼굴의 변화 속에 담아내면서도 지나친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 자기비하가 개입할 수 없는 균형과 거리를 유지한다. 렘브란트 자화상이 갖는 미학적 가치와 도덕적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금욕주의자 파스칼의 「회상록」과 세속적인 삶의 활기를 기념하는 쾌락주의자 피프스의 일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당대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참여관찰자’ 피프스의 일기가 햄릿이 말한 “세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면, 파스칼은 절대자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비춰본다. 예술, 사교, 교양, 야심, 권력, 사랑, 신화 등 르네상스가 추구하고 찬미한 인간의 자족성과 존엄성에 대해, 그는 햄릿처럼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갈대에 불과함을 생각한다.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생각의 한계에 대한 사유야말로 이성의 궁극적 단계이다.
또한 개신교 음악가 바흐는 복음서에 기술된 예루살렘이라는 ‘먼 나라’의 ‘먼 과거사건’과 지금 현재 ‘나’의 대조적 연결점을 다양하게 구축한다. ‘불쌍히 여기소서’ 아리아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곧장 ‘나’의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이 아리아에서 용서를 비는 주체는 옛 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 베드로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탄원하며 노래하는 ‘나’가 된다. 이 ‘나’는 ‘나는 불완전하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바로크적 ‘주체 공식’을 따른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바로크
바로크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름이다. 그것은 과거 서양의 한 시대, 한 국면의 특수한 조건이 만들어낸 문화, 예술, 사상의 경향과 구조를 지칭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일회적인 역사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은 인간성과 인간조건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상황 또한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욕망과 기술, 도전 등 ‘르네상스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그 모순과 폐해를 목도하는 바로크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바로크와 ‘나’의 탄생』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고전적 순간들을 담아낸다. 햄릿과 친구들이 제시하는 바로크의 순간들 속에는 대립과 갈등을 오락을 통해 회피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가 스며 있다. 이들이 창조적인 형태로 변주한 햄릿의 독백은 바로크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기자는 권유이자, 사회가 요구하는 끝없는 자기 발전을 추구하느라 ‘나’를 돌볼 틈도 없는 현대인의 피로와 정신적 허기에 건네는 따뜻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