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과 국경

김선민 · 歴史
3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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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이전 시기 청제국의 영토와 거의 동일하다. 전근대 왕조의 경계 인식과 근대 국민 국가의 국경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청에서 중국으로 고스란히 이어진 국경의 역사는 매우 독특한 연구 주제이다. 현대 ‘중국’은 과거 ‘중화’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두 개념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중국은 한족과 56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만주인·한인·몽골인·위구르인·티베트인의 연합을 강조했던 청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과정에서 청제국은 역대 중화 왕조의 하나로서 현대 중국의 중화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청이 요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전, 명과 여진, 그리고 조선은 모호하고 서로 섞일 수 있는 변경을 공유했다. 만주가 바로 그곳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만주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인 동시에 청제국을 건국한 만주인의 고향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청과 조선의 관계 속에서 영토 인식와 경계 형성을 탐구하며, 오늘날 중국이 강조하는 ‘중화 제국으로서의 청’과는 다른 제국의 특징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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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한국어판 서문 4 들어가며 13 1장. 변경에서 국경으로 39 2장. 국경지대의 형성 85 3장. 국경지대의 관리 127 4장. 사람과 재화의 이동 167 5장. 국경지대에서 국경으로 205 마치며 237 감사의 말 247 주 251 참고 문헌 292 찾아보기 306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1637년 병자호란에서 1909년 간도협약까지 북벌과 북학만 남아 있던 조청 관계사의 공백을 채워라 청이 요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전, 명과 여진, 그리고 조선은 모호하고 서로 섞일 수 있는 변경을 공유했다. 만주가 바로 그곳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만주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인 동시에 청제국을 건국한 만주인의 고향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청과 조선의 관계 속에서 영토 인식와 경계 형성을 탐구하며, 오늘날 중국이 강조하는 ‘중화 제국으로서의 청’과는 다른 제국의 특징을 드러낸다. 청과 조선의 경계는 여러 집단이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는 변경frontier에서 청이 출입을 통제하는 국경지대borderland를 거쳐 근대적 의미의 국경border으로 쉼 없이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청제국의 일방적인 동아시아 질서 구축 과정, 혹은 조선의 반청이나 실학 운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청은 조선과의 국경 문제를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자애를 내보이는 기회로 삼았고, 조선은 변경의 혼란을 이용하여 평화와 안전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의 대표 산물인 인삼과 이를 욕망한 인간의 끝없는 발걸음이 한반도와 중원 양쪽의 변경이었던 만주를 역사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 지은이는 1637년 병자호란의 결과로 구성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서 출발하여, 사대와 조공의 틀 바깥에서 청과 조선이 밀접하게 접촉하고 첨예하게 갈등하며 만들어낸 변경의 역동성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응답하는 역사학 ◇ ‘역사의 쓸모’는 현실과의 작용·반작용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타이완섬을 제외하면 이전 시기 청제국의 영토와 거의 동일하다. 전근대 왕조의 국경 개념과 근대 국민 국가의 국경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청에서 중국으로 이어진 국경의 역사는 매우 독특한 역사 연구의 주제이다. 현대 중국은 전통 시대 ‘중화’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두 개념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한족과 56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만주인·한인·몽골인·위구르인·티베트인의 연합을 강조했던 청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근대 국가 중국의 영토로 수렴했다. 그러면서도 청제국을 역대 중화 왕조의 하나로 포섭하고, 현대 중국의 중화 정체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미국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신청사(新淸史, New Qing History)’ 학파는 청제국의 한화(漢化)를 반박하고 유목 제국적 특징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청사를 세계사·중앙유라시아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중국의 역사공정 시도에 대응했다. 이에 반발한 중국 정부와 학계는 21세기 초부터 2000여 명의 연구자가 참여하는 ‘국가청사國家淸史 편찬 공정’을 추진했다. 나아가 중국 학계의 일부에서는 한화론에 대한 학문적 반박을 현재 중국의 변강 지배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형성된 ‘중화민족론’을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도전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현대 역사학계의 가장 뜨거운 분야인 신청사의 주요 연구서는 한국에도 다수 출간되었다. 신청사의 대표 저작으로 ‘신사서(新四書)’라고 불리는 네 권의 책 가운데 마크 엘리엇의 『만주족의 청제국』(푸른역사, 2009), 이블린 로스키의 『최후의 황제들』(까치, 2010)이 번역되었고, 다른 두 권(Edward Rhoads,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Pamela Kyle Crossley,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도 여러 논문과 연구를 통하여 널리 소개되었다. 그 밖에도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길, 2012),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돌베개, 2013), 제임스 밀워드의 『신장의 역사』(사계절, 2013) 같은 주요 도서가 차례로 번역되며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1세기 초에 시작된 이 연구는 이제 ‘제국empire’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관점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인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청제국이 구축한 동아시아 질서는 무엇인가? 그 질서 속에서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 ◇ 신청사와 한국사의 결합이 낸 낯설고 매력적인 역사의 길 이러한 경향 속에서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인삼과 국경』(원제 Ginseng and Borderland)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청제국의 변경 지배 체제를 청-조선 경계의 역사를 통해 정교하게 조망하여, 전근대 조선을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로 여기고 있던 미국 연구자들에게 ‘한국사를 통한 중국사로의 접근’이라는 새로운 해석의 길을 제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저자인 김선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양국 국경의 역사를 17세기 초에 일어난 변경에서 국경지대로의 전환, 1712년 장백산 조사와 백두산정계비 설치를 통한 경계 설정과 이후 연행로에서 이루어진 국경 무역의 전개, 마지막으로 19세기 후반 청과 조선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면서 광역의 국경지대가 근대 국경선으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청제국은 청-조선 경계를 이용하여 제국 내에서 만주의 특별한 지위를 보호하는 동시에 이 지역 천연자원(동북의 세 보배라고 불린 인삼, 진주, 초피)의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과의 ‘특별한 관계’였다. 저자는 청은 이전의 중화 왕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오히려 티베트·몽골·신강과의 관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과 관계를 맺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강력한 청제국과 비대칭적 외교 관계 속에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려 했던 조선의 노력을 탐구함으로써 청제국의 형성과 발전에서 조선의 역할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한 양국이 경계에 대해서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도록 이끈 요인이 바로 인삼이었다고 설명한다. 인삼을 욕망하는 인간의 발걸음이 변경을 국경지대로, 그리고 국경으로 바꾸었다 ◇ 변화하는 시대와 변동하는 경계의 역사 탐구 1장 「변경에서 국경지대로」는 청­조선 관계의 초기 역사를 다룬다. 14세기 말에 다양한 여진 부족이 압록강, 두만강, 장백산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명의 통치는 요동 너머 지역에서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기에 조선은 여진과 자체적인 사대 질서를 형성했고, 영토와 인삼을 비롯한 자연 자원을 공유했다. 하지만 건주여진이 부상한 16세기 말이 되자 명과 조선, 여진의 삼각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세 나라가 공유하는 변경 또한 다시 정의되어야 했다. 후금/청은 1627년과 1637년 두 차례의 출병을 통해 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위계적인 조공 관계를 부과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았다. 한낱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이 만주로 이름을 바꾸고 천조의 통치자가 됨에 따라 조선인이 채삼과 수렵을 목적으로 만주를 오가는 일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만주와 만주의 자연 자원은 19세기 말까지 만주인의 배타적 소유물로 인정되었다. 청의 동북 정책은 넓게 보면 만주, 좁게 보면 인삼에 대한 특수한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청이 조선과의 경계 설정에 임하는 태도와 전략 또한 마찬가지였다. 2장인 「국경지대의 형성」에서는 만주를 성역화하고 그곳의 자연 자원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장백산을 만주인의 발상지로 가공한 강희 연간의 노력을 확인한다. 조선인의 불법 채삼이 증가하자 강희제는 장백산, 나아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대한 지리 측량을 실시했다. 두만강 수원지의 정확한 위치는 모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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