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가장 박학다식하고 위트 있게 풀어내는 책
완전히 다른, 감추어진 이야기로 당신을 초대한다
·오페라 가르니에와 파리의 벌꿀
·20세기 초 한 수녀의 스타트업 이야기
·혁명은 밥솥 안에서
·103년 만에 오보 수정한 『파이낸셜타임스』
·늑대들의 독일 이주
·하느님은 당신의 세금 납부를 감시하고 있다
·소련의 전기자동차 РАФ-2910
프랑스 파리의 한 치즈 가게에서 가게 주인과 손님이 계약서를 썼다. 치즈 한 덩어리를 사고팔면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은 보포르 치즈 때문이다. 영어 언론인 『더 로컬』 프랑스 지사의 영국인 기자 벤 맥파틀랜드는 연말도 되고 해서 퐁뒤를 해 먹으려고 치즈를 사러 파리의 치즈 가게에 갔다. 그가 가게에 들어와 보포르 치즈 200그램을 달라고 하자 주인은 “뭘 해 드시려고?”라고 묻고 “퐁뒤”라고 하자 “그건 안 되지”가 된 것이다. 이후의 대화다.
가게: 안 돼. 퐁뒤용으로 보포르는 지나치게 좋아요. 그거 녹는 꼴을 보자니 내 마음이 다 아프네.
기자: 하하, 농담도 무슨! 그럼 400그램 주세요.
가게: 안 돼요. 그거 낭비야. 킬로그램당 39유로 하는 2015년산 보포르는 퐁뒤용으로 너무 비싸요.
기자: 가격은 상관없어요, 그냥 주세요.
가게: 안 된다니까. 차라리 아봉당스Abondance를 줄게. 비슷한 치즈이고 더 저렴하기까지 하니.
기자: 그래요. 하지만 보포르도 같이 주세요.
가게: 퐁뒤에 넣을 거지?
기자: 예.
가게: 그럼 안 돼.
유럽판 ‘수호지’
결국 가게 주인은 보포르를 녹이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받고서야 치즈를 판다. 이른바 파리의 ‘치즈부심’ 이야기다. 그런데 다들 살면서 한번쯤은 겪어본 얘기 같지 않은가. 김치찌개에 라면 사리를 넣으면 육수가 탁해진다면서 끝내 라면을 주지 않고 당면 사리를 내오는 식당 주인은 한국에도 있다. 이렇듯 사소한 사건, 사고들을 모아서 유럽의 진한 맛을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현직 외교관이 쓴 『남의 나라 흑역사: 사건과 인물로 읽는 유럽 어른들의 속사정』이다. 이 책은 완전히 다른 유럽을 보여준다. 다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해온 저자가 그들의 하루하루 뉴스, 광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문서에서 찾아낸 여러 이야기에 그동안 쌓아온 필력과 내공으로 써내려갔다. 우리의 김치부심 못지않은 파리의 치즈부심, 실체가 없는 파리지엔, 그리고 유쾌하게 맥주를 따라주며 인생을 즐겼던 중세의 마녀들, 여기에 프레디 머큐리가 떠오르는 의상도착자 르데 남작까지 다양한 군상이 유쾌하게 어우러진 이야기 마당이 펼쳐진다. 추천사를 쓴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유럽판 『수호지』” 같다고 했다. 서로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탐내는 실제 유럽의 뒷사정을 이렇게 재미있고 유쾌하게 비춰주는 책은 없었다며 말이다.
오페라 옥상에서 벌을 친다고?
책 첫머리에 실린 「오페라 가르니에와 파리의 벌꿀」이 남들은 잘 모르는 숨겨진 유럽 이야기라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다. 프랑스 파리 9구에 있는 오페라 극장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가극에 쓰이는 소도구, 특히 가구를 담당하던 그래픽 아티스트였던 장 폭통은 취미가 양봉이었다. 그는 처음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 벌을 치려고 했으나 이웃들이 싫어해 파리 북부로 벌통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데 운반하는 2시간 동안 벌들이 죽을지 몰라 고심하다가 자신이 근무하는 오페라 극장 옥상에 벌통을 갖다놓는다. 회사엔 나중에 꿀을 따면 오페라의 숍에서 팔면 이득이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파리 도심의 벌꿀은 인기폭발이었다. 왜냐면 파리시내는 외곽보다 온도가 높고, 정원이 많아 꽃들이 다양해 고급 벌꿀이 생산되기 맞춤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공 이후 파리의 민간 건물 옥상 위엔 우후죽순 벌통이 놓이기 시작했고 메이드 인 파리 벌꿀의 신화가 탄생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외교관이라는 직업상 한국의 상황만큼이나 늘 유럽의 변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나는 왜 첫 저서에서 거대한 이야기보다 작은 이야기들에 집중하게 됐을까? 원래부터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한 면모들에 관심이 많다. 그렇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근대 이후로 세상을 평정한 서구 문명권도 속살을 들여다보면 여타 문명과 별다를 게 없고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 근거들을 계속 발굴하다보니 이런 형태의 책이 나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령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은 여러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7월 14일로 정해졌고, 현대에 집권했던 영국의 모 총리는 미신을 믿었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에도 재벌은 있었고 소련에도 향수香水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우리처럼 영어 사용 논쟁이 있었던 데다 프리메이슨이 다른 곳도 아닌 헌법에 등장했다.
이 책은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5개국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루며 목차를 나라별로 나누기는 했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국경을 넘나들고(가령 메르세데스 벤츠는 독일에서 태어나 알바니아에서 죽는다), 또 어떤 이야기는 목차와 관련성이 그리 크지 않다(테넷의 프리포트는 사실 프랑스의 이야기라기보다 스위스와 모나코가 주요 무대다). 그래도 국가별로 분류한 이유는 밥솥에서 인터넷 주소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제를 망라하고 있기에 독자가 읽기 가장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박학다식이 주는 즐거움
이 책을 읽는 묘미는 박학다식이다. 친구와 만나 “그런 거 알아?”라고 하며 이야기를 주도하기 좋은 소재들이 널려 있다. 압력솥의 원조는 어디일까. 정답을 말하면 17세기의 프랑스다. 그러나 그 과실은 영국이 차지했다. 현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드라큘라는 1897년에 나온 브램 스토커의 소설이 아니고, 아일랜드의 작가 셰리던 르 패뉴가 1871~1872년 『다크 블루』라는 잡지에 연재한 『카밀라』였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미남 ‘미스터 다시’는 어떻게 생겼을까. 저자는 당시 영국의 훈남 이미지를 토대로 머리는 파우더를 칠한 흰색, 수염은 없고 귀족이므로 피부색은 창백하며, 형태는 긴 타원형, 뾰족한 턱과 작은 입을 추리해낸다. 시간을 건너뛰어 20세기로 오면 오늘날 보편화된 자율주행차의 시초를 캐들어간다. 독일의 에른스트 디크만스는 1980년대에 자율주행차를 개발했다. 우주공학 박사였던 그는 1970년대 말 기계에게 시각視覺을 가르치는 연구를 했고, 메르세데스 밴을 자비로 구입해 컴퓨터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다시 16세기로 건너가 독일과 프랑스 접경지역 스트라스부르의 춤 전염병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여름의 스트라스부르의 한 마을에서 7월 14일 트로페아 부인은 거리에 나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남편은 그만 좀 추라고 간청했으나 부인은 남편을 무시하고 계속 춤을 췄다. 몇 시간이고 추다가 어둠이 깔리고 지치는 데다 배가 고파 트로페아 부인은 쓰러진다. 하지만 다시 이튿날이 되자 트로페아 부인은 거리에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흘간 춤을 이어가자 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부인과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 춤은 일주일간 계속됐고 결국 당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원인은 히스테리였고 치료는 ‘성당’이 맡았다. 하지만 전염은 점점 확대됐다. 곡물 곰팡이에 감염돼 그렇다는 분석부터 저조한 수확, 불안한 정치, 매독이 발작적인 춤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이어졌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뒷고기처럼 양은 적지만 오묘한 맛
이 책을 굳이 요리에 비유한다면 김해에서 유명한 뒷고기 같다. 고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고기를 도축하면서 양은 적지만 오묘한 맛이 있는 고기를 감추어 먹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책도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유럽의 속살을 경험한 필자가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유럽의 숨어 있는 역사를 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