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서였음을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한국의 20세기를 이끌었던 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우리가 살면서 제일 중요하고 치열하게 좇았던 가치와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사회의 집합 심리를 예각적으로 탐구해 온 사회학자 김홍중은 전쟁,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급격한 경제성장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마침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생존주의(survivalism)’를 제시한다.
생존주의에 의하면, 세계는 정글이다. 경쟁과 도태의 공간이다. 생존주의자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따라서 생존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치들은 배제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한국의 20세기는 살아남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이에 방해되는 것들을 피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존주의로 특징지어진다.
그동안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이 있었다. 서구의 제도들을 빠르게 수용하며 근대화 과정이 복잡하게 혼재된 ‘압축적 근대성’, 정치와 경제에 과도한 중심성이 부여되는 ‘환원근대’, 냉전 시기의 전쟁과 군대를 중요시하는 ‘군사화된 근대성’, 유교를 주된 문화적 자원으로 두고 동아시아 유교 문명의 큰 틀 위에서 한국 근대를 바라보는 ‘유교적 근대성’ 등이 다.
그런데 이 이론들은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시간을 직접 겪어내고 살아낸 시민들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서글프고, 야비하고, 모질고, 집요해야만 했던 순간들 면면에 가닿지 않았다.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들임에도 우리는 왜 이 순간들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살아남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음에도 이야기되지 않느라 한국의 근대, ‘K-모더니티’의 문은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이 책이 제시하는 생존주의라는 열쇠를 통해 이제 우리는 문을 완전히 열고 20세기 한국사회를 비로소 완연히 이해하고 그다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김홍중은 한국사회에서 20세기 생존주의에 세 차례의 큰 변곡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야기한 충격 속에 형성된 ‘만국공법(萬國公法) 생존주의’. 둘째,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에서 형성된 ‘냉전 생존주의’. 셋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자유주의 생존주의’다. 이 책에서 특히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냉전 생존주의다. 김홍중은 박정희의 통치 사상을 생존주의적 통치성의 관점으로, 정주영이 꿈꾼 한국 자본주의 정신을 생존지향적 발전주의로 해석한다.
더불어 김홍중은 미술과 문학 텍스트에 형상화된 생존주의를 함께 짚어 낸다. 전후 폐허 속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생존해 나가는 한국 민중의 생명성을 그린 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裸木)’ 이미지를 분석하고, 김기영 영화의 근원적 상상력을 ‘살아남는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으로 해독하기도 한다.
한편, 생존주의가 팽배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인간 삶에서 궁극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며 타당한’ 가치는 어떻게 추구되는가? 추구될 수 있기야 한 걸까? 생존주의로 가득한 사회에서 이러한 사회적 가치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회적인 것의 공동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김홍중은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신학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추구하며 타자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존의 상상력을 소개한다.
이제 근대를 넘어 21세기로, 비로소 오늘로 내일로
한국 근대의 간판 사상은 ‘존재’도 ‘실존’도 아닌 ‘생존’이다. 생존은 근대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가장 근본적 문제이자 강박관념이자 이념이다. 한국사회의 성취와 모순, 빛과 그림자, 가능성과 절망을 모두 끌어안은 근원적 사상이자 서글프면서도 야비하고 잔인한 질문이다. 즉, 우리의 근대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을 시도한 이 책은 한국 근대에 대한 치열한 자기성찰이자, 한국사회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새로운 한국사회의 가치와 욕망에 대한 실험적 탐색의 기록이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살아냈고 앞으로 살아낼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21세기 한국사회가 좇고 있는 가치와 욕망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이해하는 한편으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것인지 성찰하고 가늠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