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우치다 타츠루 · 人文学
4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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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 그의 대표작 『시간과 타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뒤 파리 철학학원에서 이뤄진 네 차례 강연(1946~1947)을 토대로 엮은 책이다. 레비나스 저작 가운데 가장 얇고 원서로도 80쪽밖에 되지 않지만, 난해하기로 이름 높아 도중에 책장을 덮고 만 독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시간과 타자』를 일본의 지성 우치다 다쓰루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충실히 새기면서” 6년간 독해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가 전후(戰後) 시공간에서 굳이 시간론을 꺼내 든 건, 깊은 고통의 시간을 겪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몸담은 유대인 공동체에 ‘희망의 시간론’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이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익어가는 어떤 것임을, 주체와 타자의 관계임을,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하는 가운데 미래가 현재 속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임을, 저자는 처음 모국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천천히 더듬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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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예비적 고찰 1. 살아남은 자 2. 후설의 현상학 3. 현상학과 성서 4. 신앙과 시간 5. 유책성 (1) 6. 유책성 (2) 7. 유대적인 앎 1강 읽기 8. 레비나스를 해석하는 규칙 9. ‘실존’의 고독 10. ‘실존자’ 없는 ‘실존’ (1) 11. ‘실존자’ 없는 ‘실존’ (2) 12. ‘실존자’ 없는 ‘실존’ (3) 13.. ‘실존자’ 없는 ‘실존’ (4) 14. ‘실존자’ 없는 ‘실존’ (5) 15. ‘실존자’ 없는 ‘실존’ (6) 16. ‘실존자’ 없는 ‘실존’ (7) 17. ‘실존자’ 없는 ‘실존’ (8) 18. 위상전환 (1) 19. 위상전환 (2) 20. 위상전환 (3) 21. 위상전환 (4) 22. 위상전환 (5) 23. 위상전환 (6) 24. 위상전환 (7) 25. 고독와 위상전환/고독과 질료성 2강 읽기 26. 일상생활과 구원 (1) 27. 일상생활과 구원 (2) 28. 세계에 의한 구원—양식 29. 빛과 이성의 초월 (1) 30. 빛과 이성의 초월 (2) 3강 읽기 31. 노동 32. 고뇌와 죽음 33. 죽음과 미래 34. 죽음과 타자 (1) 35. 죽음과 타자 (2) 36. 죽음과 타자 (3) 37. 외부적인 것과 타자 38. 시간과 타자 4강 읽기 39. 얼굴을 감추는 신 40. 권력과 타자관계 (1) 41. 권력과 타자관계 (2) 42. 원초적인 뒤처짐 (1) 43. 원초적인 뒤처짐 (2) 44. 시간 의식의 성숙 (1) 45. 시간 의식의 성숙 (2) 46. 응답 책임 (1) 47. 응답 책임 (2) 48. 응답 책임 (3) 49. 응답 책임 (4) 50. 에로스 (1) 51. 에로스 (2) 52. 에로스 (3) 53.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타자의 부재 54. 로젠츠바이크 (1) 55. 로젠츠바이크 (2) 56. 로젠츠바이크 (3) 57. 로젠츠바이크 (4) 58. 에로스 (4) 59. 에로스 (5) 60. 에로스 (6) 61. 에로스 (7) 62. 타자와 외부적인 것 63. 풍요로움 (1) 64. 풍요로움 (2) 65. 풍요로움 (3) 66. 풍요로움 (4) 맺음말 약호 주 옮긴이의 말: 오래된 악보를 연주하는 생명의 시간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살아남은 자의 책임 ―레비나스 그리고 『시간과 타자』 20세기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철저한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러시아 혁명으로 유대인 박해에 시달리다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되어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고 만다. 친척 대부분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뒤 파리에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철학학원에 모여든 청중을 향해 이런 요지의 말을 남긴다. ‘타자는 이방인이자 과부이고 고아이며,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실제로 그의 아내와 딸은 나치 점령 아래 파리에서 말 그대로 과부이고 고아인 처지였다. 다행히 이들 세 사람은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말이다. 살아남았다는 것. 이에 대한 인식은 전후 레비나스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화두가 된다. ‘나 자신이 살아남은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수많은 친족과 동료를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그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누군가가 죽고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 남들보다 덕을 쌓아서도 아니고, 신앙이 두터워서도 아니고, 일부러 누가 살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가 죽고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을 수 없었던 자’ 사이에는 실은 결정적인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직면하게 된 비극이다.”(30쪽) 그리하여 다시금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로서, 살아남은 자만이 이행할 수 있는 책무를 지기로 한다. 이것이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시간과 타자』의 출발점이었다. 시간은 너와 나 사이에서 흐른다 ―우치다 다쓰루가 읽는 ‘희망의 시간론’ 『시간과 타자』(1979)는 장 앙드레 발이 주관하는 철학학원(College philosophique)에서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네 차례 이뤄진 강연을 토대로 한 책이다. 강연 당시 레비나스에게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홀로코스트로 해체 위기에 놓인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를 영적으로 재생하게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런데 왜 하필 ‘시간론’이었을까. 전쟁 전의 레비나스는 강연에서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논하기는 했어도 시간론을 본격적으로 꺼내 든 적이 없었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가 철학학원 강연 주제로 선택한 ‘시간론’이란 깊은 고통의 시간을 살아낸 유대인에겐 곧 희망의 시간론이었을 것”이며 “그 점 말고는 레비나스가 이 시점에 굳이 시간론을 논할 까닭이 없었다”고 본다.(13쪽) 먼저 『시간과 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강연의 목적은 시간이란 고립한 단독의 주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 자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13쪽) 여기서 ‘고립한 단독의 주체’라는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 말이며, 더 나아가서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토대가 되어온 ‘자기동일적인 주체’ 개념을 겨냥한 말이다. 정신에는 외부가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기지(既知)라는 것, 인간에게는 타자가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관념이었다.(87쪽)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런 고립된 주체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며, 시간이란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는 자기동일적인(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 그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곧 레비나스의 시간론임을 암시하는 문장이다. 젊은 날 레비나스는 후설 문하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당대 독일 최고의 지성 하이데거를 상세히 연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복무한 뒤로 레비나스는 더 이상 그의 조술자 노릇에 머물 수가 없었다. 단순히 하이데거가 나치스에 입당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립된 주체를 내세우고 타자를 무화해버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 자체에, 어쩌면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의식을 지배해온 사상 전반에 홀로코스트의 씨앗이 뿌려져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레비나스는 ‘나’ 아닌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지금/여기’에만 묶여 있는 사람들, 과거를 ‘조금 전의 현재’로 또 미래를 ‘조금 후의 현재’로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뒤처짐’과 ‘죄의식’과 ‘응답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즉 하이데거 존재론의 권역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사람들 손에서 홀로코스트가 만들어졌으리라고 여겼다.(289쪽) ‘시간과 타자’ 강연 무렵 집필한 『실존에서 실존자로』를 통해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철학의 권역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깊은 욕구를 이야기한다.(103쪽) 타자, 미지(未知), 현재/현전, 책임(유책성) 등 레비나스 시간론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들은 바로 그 욕구에서 파생한 ‘어휘 꾸러미’라고 볼 수 있다. 여성과 비체(卑體), 퀴어, 장애, 비인간 동물 등을 둘러싼 소수자 담론이 달아오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레비나스 시간론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모국어를 배우듯 레비나스 언어에 다가가기 ―우치다 다쓰루식 독해법 『시간과 타자』는 짧고도 난해한 책이다. 40년 가까이 레비나스를 연구해온 우치다 다쓰루 역시 몇몇 개념에 대해서는 “끝끝내 그것을 ‘습득’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448쪽) 그럼에도 『시간과 타자』를 붙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책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책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어떤 메시지의 의미를 잘 모르더라도 그 메시지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는 것, 말하자면 메시지의 수신처가 나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성서 속 하느님이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을 때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답하는 아브라함처럼,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곧 나의 책임임을 『시간과 타자』는 줄곧 강조해왔다.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타자와 나의 관계가 생성되고 거기서부터 사건이 발생하며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처럼 레비나스 읽기’를 시도한다. 의미를 모르더라도, 모른 채로 읽어나가는 것. 이는 어린아이가 모어를 습득하는 방법과도 유사하다.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말을, 그 뜻은 모를지언정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발음해 가며 언어를 배운다. 우치다 다쓰루는 그렇게 더듬더듬 ‘레비나스어’에 다가갈 것을 권한다. 요컨대 이 책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은 레비나스어 초급자(한때 『시간과 타자』를 읽으려다 낙오한 독자들, 혹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초심자들)를 위한 독본이다. 저자는 다음 규칙에 유념해 집필했음을 밝히고 있다. 1. ‘알다시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2. ‘모르는 것’은 그대로 ‘모른다’고 쓴다. 3. 한참 진행하고 나서 “앞에 쓴 것은 틀렸습니다” 하며 앞서 서술한 이야기를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이, 혹은 『시간과 타자』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 독자가 있다면, 부디 저자의 안내에 따라 끝까지, 함께 책장을 넘겨나가자. 미지의 어휘가 손끝에 닿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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