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장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해!
1. 메피스토와 부정하는 영
2.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해!
3. 구원받은 파우스트의 영혼
4. 《파우스트》와 탄생 부정
2장 탄생은 해악인가
1. 오이디푸스 왕
2. 세계와 삶에 대한 저주
3. 베네타의 탄생해악론
4. 반출생주의의 여정
3장 쇼펜하우어의 반출생주의
1. 생명론으로 전환된 칸트 철학
2. 살고자 하는 의지
3. 일체의 삶이 고통이다
4. 무의지 상태야말로 최고선
5. 자살에 대하여
6. 죽음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것
7. 쇼펜하우어의 영향력
4장 윤회하는 불멸의 아트만
1. 윤회사상의 탄생
2. 숙면을 통해 아트만에 도달하기
3. 네가 그것이다
5장 부처는 탄생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1. 모든 것은 고통이다
2.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한 경지
3.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4. 원시불교와 자살
6장 니체: 태어난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1. 생을 긍정하는 철학자
2. 영원회귀
3. 운명애
4.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5. 니체와 탄생 긍정
7장 탄생을 긍정하기, 생명을 철학하기
1. 탄생해악론에 대한 재고
2. 선에서 악이 생겨나는 것은 악인가
3. 아이를 낳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4. 응답 책임 원리
5. 탄생 긍정의 철학으로!
6. 생명철학으로!
후기
미주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모리오카 마사히로 · 人文学
348p

일본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리고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던 건 아닐까?’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 선 책이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에서부터 붓다, 쇼펜하우어, 니체, 그리고 현대의 반출생주의 철학자 베네타에 이르기까지, ‘탄생 부정’이라는 사상의 계보를 따라간다.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어떻게 그 부정을 넘어설 수 있을까? 모리오카는 어떻게든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암흑에서 빠져나와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광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탄생 긍정’이라 부른다. 그것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는 억지가 아니라, 고통과 모순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려는 철학적 결단이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는 서양과 동양, 문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살아 있음’의 의미를 다시 묻는 책이다.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빛을 길어 올리는, 현대 생명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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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レビュー
3目次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불안·공포·고립·불평등, 삶은 행복을 느낄 수 없게 설계된 것일까?
기후 위기, 전쟁, 팬데믹, 불평등, 헬조선, 취업난, 관계의 단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런 문제 속에서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이럴 바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삶은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이런 고립감은 자연스럽게 반출생주의로 이어진다.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반출생주의에 매료되는 사람들
오늘날 반출생주의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지구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아이를 낳지 말자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에 나타나는 무수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는 익명의 중얼거림은 양극화된 사회에서 억압받고 살아가는,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내뱉는 원망 섞인 표현들이다. 이 고통스러운 세계 속에서의 ‘태어남’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 사건이다. 그래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계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반출생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간다.
삶의 고통은 고대부터 쭉 이어져 온 인류의 오랜 숙명
탄생에 대한 부정, 삶의 고통, 고립, 불안, 공포는 현대인들만 겪는 일일까? 과거의 사람들은 어땠을까? 일본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인류의 역사는 탄생 부정과 삶의 긍정이라는 장대한 드라마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파우스트>, <햄릿>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온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지적 세계에서는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고대부터 태어남을 ‘고통’으로 보는 관념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쇼펜하우어, 니체, 부처를 비롯해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탄생과 삶의 의미에 매달렸을까? 이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 탄생 부정에서 탄생 긍정으로
일본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반출생주의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동서양의 고전과 철학을 넘나들며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는지’ 역사적 근원을 파헤쳤다. 그는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반사실적 상상을 제대로 완수하려면 지금 여기서 그 상상을 수행하려는 내 존재 역시 지워야 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나는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라고 한탄해도 이제 와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살아가는 의미’ 문제를 ‘태어난 것의 긍정’ 문제로 전환하고 철학적으로 추구해갈 것을 제안한다.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긍정의 문제로 설정하는 편이 더 알찬 성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잃고 경계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
이 책은 ‘삶의 의미’ ‘탄생의 의미’를 파헤친 철학서이다. 누구나 쉽게 읽으며 공감의 밑줄을 그을 수 있는 간결한 생명철학 교양서이다. 특히 삶의 이유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조용하지만 강렬한 지적 위로와 함께 용기를 건넬 것이다.



페리클레스
4.0
2️⃣ pp.40~41 탄생 부정과 자살의 관계는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사상은 자살성 사고를 가진 인간에게는 맹독으로 작용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탄생 부정 사상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으려는 사람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말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와 '죽는 게 낫다'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생각을 내가 지금 여기서 실행할 방법은 없습니다. 나는 이미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없던 일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죽는 게 낫다'라는 생각은 지금 여기서 실행할 수 있습니다. 자살로 그 생각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즉, 자살을 통해 긍정되는 것은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는 사고방식이지, 결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 점을 논리적으로 잘 파악해야 합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고 한탄하면서 그 이유로 자살하는 행위는 철학적으로 착오입니다. 다시 말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절규는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는 절규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단적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말 안에는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는 사상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물론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생각이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자에 후자가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는 자신을 살아있는 상태에 둔 채, '태어나지 않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려는 정념입니다. 자신을 살려둔 상태에서 자신의 탄생을 철저히 부정하려는 사상입니다. 만약 이것을 메피스토처럼 진전시키면, 자신에 국한하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의 탄생을 부정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반존재적 사고방식으로 귀결합니다. 3️⃣ p.48~49 여기 새하얀 캔버스가 있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캔버스는 최고로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 하얀 캔버스에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물감을 사용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원래의 새하얀 아름다움을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도리어 곳곳에 칠을 잘못해서 더러워지는 부분이 나올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캔버스를 그대로 하얗게 놔두는 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라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베네타의 주장을 이런 비유로 이해해보았습니다. 베네타의 주장에서, 하얀 캔버스가 최고의 상태이고 거기에 한 점이라도 물감을 묻히면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는 결벽증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베네타는 "비록 좋은 일이 가득한 삶일지라도 나쁜 일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다시 말해 행복이 가득한 삶일지라도 바늘 끝으로 딱 한 번 찌를 정도의 아픔으로 더렵혀졌다면 그 인생은 인생의 비존재보다 반드시 나쁜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이 문장에는 베네타 사상의 핵심이 훌륭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베네타는 낙태에 대해 '태아사망주의 Pro-death' View of Abortion'를 주창합니다. 즉 임신한 여성은 태아를 낙태해 사망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며, 만약 낙태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 합당한 고차원의 이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해야 할 인류의 수는 '0명'입니다. 인류는 멸종해야 합니다. 그 멸종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멸종은 자살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단계적인 출산율 저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베네타의 사고방식은 극단적이지만, 인류의 단계적 멸종을 주장한 사람이 베네타가 처음은 아닙니다. 노르웨이 철학자 베셀 삽페도 <비극성에 대하여>에서 같은 발상을 제시합니다. 삽페는 인류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산율을 인류의 재생산이 가능한 선보다 낮춰가자고 전세계적으로 합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인류 멸종 사상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특히 베네타 사상의 남다른 점은 인류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의 고통도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베네타는 인간을 포함한 고통을 느끼는 모든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희망합니다. 그런 우주에서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해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라는 메피스토의 말과 비교해봅시다. 메피스토는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았다고 말합니다. 소포클레스나 베네타는 그 정도까지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7️⃣ pp.100~102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리비도 Libido 같은 개념을 보면 잘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에세이 <쾌감 원칙의 피안>에 나오는 성향과 죽음의 고찰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에세이 후반부에서 성과 죽음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근저에는 쾌감 원칙이 있는데, 실은 그것을 능가하는 반복 강박의 욕동慾動이 있습니다. 이는 생명체가 초기 상태를 회복하려는 욕동입니다. 생명체에게 초기 상태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생명체는 밑바탕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는 쪽으로 향하는 욕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은 변화와 진보를 모색한다는 설이 있지만, 프로이트는 그 설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 즉 생명이 태어나기 전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이며, 이를 부연하면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죽음이다'입니다. 프로이트는 지구의 생명진화의 첫 시점에서 갓 태어난 생명이 갖는 최초의 욕동은 '생명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욕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원초의 생명은 이 욕동에 따라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결정적인 생명의 진화가 일어나면서, 생명은 생식을 통해 자손을 남기고 죽는 우회로를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우회로를 지난다고 해도 결국 생명은 죽습니다. 그러나 한 개체가 죽더라도 그 생명은 자손에게 이어지므로 어떤 의미에서 생명이 죽을 때까지의 시간은 지연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생명에는 가능한 한 빨리 원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욕동'과 죽음으로 가는 경로를 우회하여 가급적 생을 연명하려는 '성의 욕동', 이 두 가지가 각인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전자를 '생명을 죽음으로 이끄는 욕동'이라 부르고 후자를 '생명의 갱신을 항상 요구하고 관철하려는 성의 욕동'이라 부릅니다. 이른바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입니다. 프로이트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별개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의 욕동도 결국은 죽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욕동과 같은 방향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의 욕동에 대한 다음의 문장을 읽으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결정적인 외부 영향이 작용하여 그 시점에 생명을 가지고 있던 물질이 원초적 생명의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 복잡한 우회로를 경유하여 최후에는 죽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성의 욕동은 생식이라는 우회로를 경유함으로써 생물종의 죽음이 도래하는 것을 연장한 데 불과하며, 그 목표가 죽음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쇼펜하우어의 세계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 우리 몸이 죽을 수 없도록 막는 것. 죽음이 그때마다 연기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썼습니다. 프로이트도 "우리는 뜻하지 않게 쇼펜하우어 철학의 '항구'로 뱃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따르면 죽음은 생명의 '본래적 결과'이며 '목적'이기도 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이 에세이 주석에서 플라톤과 함께 우파니샤드가 언급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가설을 어느 정도까지 믿는지 스스로도 모른다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를 경유한 반출생주의가 프로이트의 에세이 <쾌락 원칙의 피안>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습니다. 프로이트의 반출생주의와 생물진화론 해석은 독특합니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욕동을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그 다음 좋은 것은 온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탄생 부정 사상에 적용해서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 생명의 욕동을 그런 탄생 부정에 대한 반항으로 설정합니다. 그러나 그 반항은 기껏해야 탄생 부정의 손바닥 위에서 이루어질 뿐, 아무리 생물종의 생명이 지연된다고 해도 개체의 죽음이 연속됨에 따라 결국에는 생물종이 멸종하면서 그 생명은 무로 돌아갑니다. 8️⃣ pp.113~115 또한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다음의 우화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언어' '시각' '청각' '사고' '정액' '숨' 들이 모여 누가 가장 잘났는지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브라흐만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브라흐만은 "너희들 하나하나가 차례로 번갈아가며 인간의 몸에서 밖으로 나갔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이 그 인간에게 가장 탁월한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먼저 언어가 인간의 몸 밖으로 나갔다가 1년 후에 다시 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시각, 청각, 사고, 정액이 하나씩 차례로 그 인간의 몸 밖으로 나갔다가 1년 후에 다시 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그 인간의 몸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나머지 구성 요소들은 황급히 숨에게 나가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숨이 나간다면 그 인간 자체가 죽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은 인간의 몸속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숨이 가장 탁월한 구성 요소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사고보다 숨이 더 탁월하다는 생명관입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도 흥미로운 우화가 소개됩니다. 나라다는 사나트 쿠마라로부터 "네가 배운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라고 지적받습니다. 나라다는 "이름보다 위대한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나트 쿠마라는 "언어는 이름보다 위대하다"라고 답합니다. 나라다는 "그럼 언어보다 위대한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사나트 쿠마라는 "사고는 언어보다 위대하다"라고 대답합니다. 나라다는 "그렇다면 사고보다 위대한 것은......?"이라고 묻고, "의도는 사고보다 위대하다"라는 답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위대한 것은 '이해력' '심사숙고' '인식' '힘' '음식' '물' '열' '허공' '기억' '희망'의 순서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숨은 희망보다 위대하다"라고 답합니다. 즉 숨이 목록에서 맨 위에 놓이며, 그 숨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트만입니다. 이 목록을 봤을 때 놀라운 점은 유럽 철학에서 인간의 가장 큰 본질로 여긴 '사고'나 '인식'이 위대함의 목록에서 숨보다 훨씬 하위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숨은 사고나 인식을 훨씬 능가하는 위대함을 지녔다고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목록에서 숨은 아트만에 가장 근접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 텍스트에서는 숨이 아트만과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지만, 숨이 곧 아트만이라는 사고방식이 우파니샤드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의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카우시타키 우파니샤드Kausitaki Upanisad>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드라에게 "나는 숨이다. 영지英知체로서의 자기[아트만]이다. 그런 것으로, 나를 수명으로, 불사하는 것으로 명상하라!"라고 말합니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 Taittiriya Upanisad>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숨을 브라흐만으로 명상하는 사람들 - 그들은 그야말로 수명을 전부 누린다. 왜냐하면 숨은 생명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체의 생명'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와 같이 우파니샤드에는 숨이야말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그 밑바탕에서 살리는 것이라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 생명의 본질이 숨이라는 관념은 고대 세계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신이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살게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카구치 후미는 고대 기독교에서 '성령Pneuma'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명을 주는 우주의 숨결'을 의미하며, 신플라톤주의에서는 '가시可視의 우주 전체를 낳고 감싸고 지배하며 지탱하고 생명을 주는 원리'라고 했습니다. 숨은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고,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우파니샤드나 그에 앞선 <리그 베다Rig veda>에서 볼 수 있는 '숨으로서의 아트만'은 지중해 세계로 확산된 기식적氣息的 생명관의 원초적인 형태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는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공유한 세계관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윤회하는 숨으로서의 아트만'을 '살고자 하는 의지'와 동일시한 듯합니다. 인간이 죽었을 때 숨으로서 아트만이 그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듯이,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인간이 죽은 뒤 파괴되지 않고 다른 인간으로 윤회환생합니다. 🔟1️⃣ pp.222~225 베네타의 탄생해악론을 '나'의 경우에 적용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나의 비존재라는 선'으로부터 '나의 존재라는 악'이 생성하는 것, 즉 '내가 태어나는 것은 악'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내가 태어날 경우, 내가 태어나는 사건에 의해 비로소 '태어난 것의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우주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고, 거기에서 봤을 때 '내가 태어나지 않을 경우의 선악'과 '내가 태어날 경우의 선악'을 판단하는 방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결정적이며, 베네타는 탄생해약론에서 이 논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 점을 파고들어 봅시다. 베네타는 내가 존재할 경우의 선악에 대해서는 쾌락과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논의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의 선악에 대해서는 '만약 내가 사실과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반사실 조건법으로 논의합니다. 저는 후자에서 베네타가 반사실 조건법을 취한 데 큰 허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다른 논문에서 비판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백보양보해 그의 논의가 옳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선이고,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악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나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내 상태에 대해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대해서도 내 비존재를 반사실적으로 상상해보면서 선악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판단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 의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생성 자체의 선악에 대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판단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베네타가 최종적으로 묻는 것은 내가 태어난 것(생성)과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비생성)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좋은가'라는 문재 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내가 태어난 것의 선악을 판단하고, 다음으로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의 선악을 판단한 뒤 그 둘을 비교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내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올바르게 조정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점이니 정밀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가 반사실적으로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가령 '만약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반사실적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반사실적인 상태에 대해 선악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가 반사실적으로 상상해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반사실적 상상을 제대로 완수하려면 지금 여기서 그 상상을 수행하려는 내 존재 역시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리 없고, 이 질문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내가 태어난 것의 부정을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이 질문을 생각하는 상태에까지 파급되므로 지금 여기의 나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한 반사실적 상상은, 그 문제를 판단해야 할 주체인 지금 이곳의 내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소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부정이 올바르게 이뤄졌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상태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반사실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이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상으로 조정하고, 그 상태에 대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경험도 하지 않는데, 그런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금 나는 여기에 존재하면서 유의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따로 벗어나 있다고 가상적으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경우' 라고 조정하는 즉시 나는 지금 여기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며, 그 조정을 유의미하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적인 존재의 차원과 달리 동적인 생성의 차원에서 나의 생성 부정은, 그것을 부정하려는 지금 여기 나의 생성마저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점에서 존재와 생성의 결정적 차이를 봐야 합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봅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는 반사실적으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지 않은 우주는 조정할 수 없을 뿐더러 애초에 말이 안 됩니다. 물론 '내가 태어나지 않은 우주'라는 문장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해석할 수 없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상상해서 선악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그것을 상상하려 하는 나의 부재 상태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현승
3.0
소위 '생명철학'보다는 동서양 철학자들에 대한 저자의 논평이 더 흥미로웠다.
영화일기장
2.0
열등감과 논리 부족에 시달리는 반-반출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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