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만나는 타자와
친구가 될 것인가,
적이 될 것인가
저 사람은 친구일까, 적일까? 상사, 동료, 이웃을 어떻게 대할지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나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한 상대를 ‘손절’할 것인가, 적대적 공생을 이어갈 것인가? 너무 많은 연결과 없는 공동체 속에서 지금 느끼는 감정에 뭐라고 이름 붙일까? 인문잡지 《한편》 12호 ‘우정’은 지금 나에게 우정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고민하는 열 편을 실었다. 에세이와 비평, 국문학에서 동물행동학, 사회인류학, 문화연구, 철학까지 삶을 위한 관계의 통로를 찾는다.
우정을 통해 창작하는 법,
다른 종과 잘 살아가는 법
여성 작가들의 창작론이 주목받는 지금 《한편》은 글쓰기 비법으로 대두한 우정을 탐구하는 세 편을 첫머리에 실었다. 작가 안담의 「작가–친구–연습」은 글방에서 배운 것을 회고한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1990년대생 여성 작가들이 다녔던 어딘글방에서는 작가의 친구가 되는 법까지 가르쳤다. 그것은 “인용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인용당하는 연습”으로, 내 이야기를 내 생각과 다르게 인용해도 참는 일이다.
평론가 이연숙은 남들처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람으로서 「비(非)우정의 우정」을 쓴다. 친구면 친구, 연인이면 연인이라는 식으로 정해진 역할을 구분하는 사회적 압력에 대응해 “영원히 반복될 너라는 대상을 향한 나의 오해”에 충실하고자 한다. 한국문학 연구자 김정은이 쓴 「자기 언어를 찾는 방법」은 1984년 결성된 동인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를 소개한다. 새로운 문화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자 잡지였던 또문은 일반적인 연구 주제를 택하지 않은 저자의 롤 모델이다. 고정희, 김혜순, 김성례, 한림화의 연결망을 조망하는 작업은 “여성 저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여자들을 애정하고 신뢰하는 방법”이다.
우정이란 또한 나와 다른 종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기도 하다. 「털 고르기를 하는 시간」은 동거 중인 개, 인간과 연구소에서 만난 침팬지 이야기를 전한다. 동물인지행동학자 김예나에게 공감이란 인간이든 동물이든 상대방의 상황을 알아가는 일이다. 상대가 보내는 신호를 정확히 파악하려 애쓰는 과학적인 태도가 사랑과 우정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뤼스 이리가레, 발 플럼우드를 번역한 영문학 연구자 김지은은 「비둘기와 뒤얽히는 영역」을 관찰한다. 수원의 한 아파트 놀이터를 점령한 비둘기와 영역이 얽혀드는 가운데 하늘에는 인근 신도시에서 쫓겨 온 떼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악어가 인간을 습격한다. 철학이 막다른 길에 이를 때 행동의 실마리는 도시 환경의 특수성과 권력의 비대칭성을 구체적으로 보는 데에서 손에 잡힌다.
극한 갈등에 처한 정치에 출구가 있을까?
식민지 조선에서 분단된 한반도를 지나
그리운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나기까지
적개심을 관리하고 연대할 전략을 찾기
여당과 야당, 남한과 북한, 한국과 일본…… 적과 친구의 구분은 정치에서 고전적인 주제다. 인문잡지 《한편》은 극한의 갈등에 빠진 현실에서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독을 깨뜨리기 위해 우정의 무대를 확장한다. 식민지 조선 문학 연구자 김경채의 「일본인이 되는 문제」는 국경을 넘을 때 ‘너의 진심은 어디에 속하느냐’고 묻는 권력 기제를 분석한다. 탄탄한 근대문학 연구사를 참조하면서 친일 지식인 최재서의 심경 고백을 해석해 보자. 사회인류학 연구자 이경빈은 「남북 관계의 굴레에서」를 초등학교 때 썼던 교환일기장을 들여다본다. ‘나’와 ‘나’의 충돌은 국제 관계에서도, 교실에서도 일어나는 법.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북한과, 나를 매일 울게 한 친구를 겹쳐 보는 인류학적 상상력으로 쓰인 글이다. “우리가 친구라고 부르며 아끼고 미워하는 많은 남들은 적이자 나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의 「정치에서 우정 찾기」는 민주주의가 좌절되는 이유를 온라인 환경에서 찾는다. 소셜 미디어에서 내전을 치르는 극성 지지자들은 저쪽 편을 악마화하며, 정치인들은 지지자들 눈치를 보느라 합의에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의 진영 싸움은 실제 문제와 무관하다. 다세대주택에서 막힌 하수구를 건물 사람들과 공동으로 뚫으려고 애쓴 경험을 들려주며 그는 사회 구성원을 향한 우애를 요청한다. 호밀밭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현정의 「바닷가 동네의 친구들」은 청소년기를 돌아본다. 부산 광안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부산은 후일을 계산하지 않고 친구들과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홍대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꾸린 밴드는 싸움 끝에 해산하지만, 10년 뒤 장례식장에서 만난 계기로 재결합하는데…… 2023년의 우정 예찬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일까? 사회학 연구자 추주희는 탈가정 청소년의 주거 형태인 ‘팸’에 대해 쓴다. 돌봄과 폭력은 의존 관계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스스로 ‘호구’가 되길 선택하는 청소년들을 보라. “비대칭적인 관계 안에서 피어나는 삶의 역량을 긍정하고 서로 의존하면서 자율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시간”은 곧 우정이다.
새로운 세대의 인문잡지 《한편》
《한편》의 편집자가 만드는 ‘탐구’ 시리즈
끊임없이 이미지가 흐르는 시대에도, 생각은 한편의 글에서 시작되고 한편의 글로 매듭지어진다. 2020년 창간한 인문잡지 《한편》은 글 한편 한편을 엮어서 의미를 생산한다. 민음사에서 철학, 문학 교양서를 만드는 젊은 편집자들이 원고를 청탁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글을 쓴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한편》 12호 ‘우정’에 적용된 글꼴은 찾기 쉽고도 어려운 밤하늘의 별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SD픽셀굿밤체로, 우리의 사이와 차이에서 반짝이는 우정의 모습을 담아낸다. 인문잡지 《한편》은 연간 3회, 1월·5월·9월 발간되며 ‘세대’, ‘인플루언서’, ‘환상’, ‘동물’, ‘일’, ‘권위’, ‘중독’, ‘콘텐츠’, ‘외모’, ‘대학’, ‘플랫폼’, ‘우정’에 이어 2024년 1월 ‘집’을 주제로 계속된다.
■ 필진 소개(게재 순)
안담 무늬글방의 대표, 엄살원의 주인장, 얼룩개 무늬의 가디언.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고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이연숙 닉네임 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15년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을,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김정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학고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여성 지식인들이 여러 모임과 교류를 주관하며 자율적인 여성주의 매체 《또 하나의 문화》를 기획·발간한 실천이 지닌 의미를 탐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식인과 대중,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학술적 글과 대중적 글 등의 공고한 이분법과 경계를 허물고 위계를 해체한 글쓰기와 문화적 실천에 관심이 많다. 주요 논문으로 「광장에 선 여성과 말할 권리」, 「누구의 문학인가」 등이 있다.
김예나 이화여자대 에코과학부, 일본 교토대 영장류연구소, 서천 국립생태원, 네덜란드 레이던대 인지심리학연구소에서 영장류를 연구했다. 최근 제주도에 동물·환경 과학 소통 단체 ‘유인원(You In One)’을 설립하여 동물과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유인원의 공동대표 안재하는 생명다양성재단 설립 멤버이며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