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대의

지젤 알리미 · 社会科学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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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7월 28일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지젤 알리미의 대표작 『여성의 대의(La cause des femmes)』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지젤 알리미는 프랑스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가로, 억압받고 소외당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낙태는 무거운 죄인데도 성폭행은 죄가 아니던 시절에 온몸으로 맞서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과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꿰뚫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치우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이고 투쟁이며 혁명이다. 대중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 지지를 끌어내고 법과 제도를 만듦으로써 완성해나가는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큰 오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지젤 알리미의 진단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방법론적 문제가 초점을 흐리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모두가 사람인 세상’이다. 이것이 지젤 알리미가 일평생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이 책에는 말 그대로 위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가 역설하는 진정한 페미니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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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옮긴이 해설_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개정판 서문_오해의 시대 초판 서문_감금당한 여성 제1장_나의 삶 제2장_선택 협회 제3장_보비니 재판 제4장_형법 제317조 제5장_낙태와 성 제6장_그르노블 사건 제7장_알리바이 제8장_투쟁의 동력 주 부록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나는 정의가 아닌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이것으로 내 일생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_2019년 8월 〈르몽드〉와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이 여성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처음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도록 해줄 것이다. 여성으로서 역할에 갇혀 있는 여성은 자신들의 억압자 역시 남성으로서 역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동시에 남성을 해방한다. 나아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역사를 만들어낸다. 한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관계는 소멸하며, 역할은 서로를 자유롭게 오간다. 이것이 페미니즘 혁명이다. 폭력과 증오가 없는 조용한 혁명이다. 언론에서 슈퍼우먼은 힘들다느니, 페미니스트는 속으로 외롭다느니, 이미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기를 못 편다느니 아무리 떠들어도 이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 왜 페미니즘일까?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인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이제 막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을 뿐이다. 페미니즘은 20년 후, 50년 후, 100년 후,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다. _개정판 서문 「오해의 시대」 중에서 ―여성 대의의 열정적 수호자 2020년 7월 28일, 20세기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민족해방전선(FLN) 활동가들을 변호하고, 낙태 합법화와 성폭행 범죄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워온 지젤 알리미가 9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자신의 아흔세 번째 생일 다음 날이었다. 그녀는 반식민지주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의 주역이었다. 프랑스의 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성폭행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지젤 알리미는 법정에서, 특히 1972년 ‘보비니 재판(낙태 합법화)’과 1978년 ‘액상프로방스 재판(성폭행 범죄화)’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녀는 어떻게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됐을까? 그녀는 어떻게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싸울 무기를 단련할 수 있었을까? 1927년 7월 27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 튀니스의 라굴레트(La Goulette)라는 마을에서 제이자 지젤 엘리즈 타이에브(Zeiza Gisèle Élise Taïeb)라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부모는 딸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 에두아르(Édouard)는 딸이 태어난 게 너무나 섭섭한 나머지 보름이 지나고서야 지인들에게 딸의 출생을 인정했다. 지젤 알리미는 남아선호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게 채워진 족쇄를 끊고자 부단히 저항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딸이 남자 식구들의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는 의무를 거부했다. 열세 살 때는 단식투쟁 끝에 설거지나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날 그녀는 일기장에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약간의 자유를 쟁취한 날이다”라고 썼다. 열여섯 살 때는 “여자는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 한다”며 부모가 정한 남자와 혼인하라는 어머니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는 딸을 공부시킬 생각도, 돈도 없던 부모에게 한 푼도 의지하지 않은 채 장학금과 무료 도서관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열일곱 살 때 그녀는 부모의 반대와 회유를 무릅쓰고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교 장학생으로 밤에는 미군 부대 전화교환원 일을 하면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 1949년 변호사로 임용됐다. 튀니지로 돌아온 그녀는 1953년, 이후 ‘모크닌 재판’으로 불린 정치 재판에서 튀니지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알제리 독립 전쟁(1954~1962) 때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등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고, 재판에 회부된 민족해방전선 활동가들을 변호했다. 이때 자밀라 부파차(Djamila Boupacha)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자밀라 부파차를 위하여 1960년 2월 10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던 스물두 살 여성 자밀라 부파차가 알제(Algiers)의 한 식당에 폭탄을 설치한 혐의로 체포된다(1959년 9월 27일에 그녀가 설치한 폭탄은 프랑스군이 발견해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됐고, 정식 수감시설이 아닌 프랑스군 막사로 끌려가 한 달 동안 군인들에게 모진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다. 1960년 3월 어느 날, 부파차의 오빠가 지젤 알리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즉시 이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1960년 5월 17일, 지젤 알리미와의 면회에서 자밀라 부파차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들이 제 질 속에 칫솔 손잡이를 집어넣고 맥주병을 밀어 넣었어요.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어요. 저를 이상한 자세로 묶은 뒤 병의 목 부분을 집어넣은 거예요. 저는 이틀 동안 울부짖다가 의식을 잃었어요.” 지젤 알리미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60년 6월 2일자 〈르몽드(Le Monde)〉 칼럼 “자밀라 부파차를 위하여(Pour Djamila Boupacha)”를 통해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군인들은 그녀의 가슴, 다리, 사타구니, 성기, 얼굴에 테이프로 전극을 붙였다. 이들은 전기고문을 가하면서 주먹질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담뱃불로 지졌다. 그런 뒤 욕조 위에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전역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지식인이 나서서 ‘자밀라 부파차 지원위원회’를 결성해 여론을 결집하자 1960년 12월 알제 법원은 사건을 프랑스로 이첩했다. 지젤 알리미는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알제리 주재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직권 남용 혐의로 고소했다. 1961년 6월 28일, 자밀라 부파차는 지젤 알리미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62년 3월 18일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Évian)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4월 21일 석방됐다. 이때부터 지젤 알리미는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고 법정에서 변론을 펼치는 페미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나도 낙태했다!” _343 선언 1971년 4월 5일, ‘낙태죄’라는 억압에 맞서 수많은 여성이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요구하고자 대규모 행동을 개시했다. 자신들도 낙태한 경험이 있다고 시인하며 피임과 낙태의 적법한 권리를 요구한 당대 여성 저명인사 343인의 공동 선언문이 〈르누벨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실렸고, 지젤 알리미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343 선언(Manifeste des 343)’이다. 그해 지젤 알리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의 대의를 선택하다(Choisir la cause des femmes)〉 협회를 설립해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수많은 여성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페미니즘 투쟁을 본격화했다. 협회의 슬로건은 “임신은 나의 선택이다!”, “피임은 나의 자유다!”, “낙태는 나의 최후 수단이다!”였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십자군이 아니다. 어머니가 되는 일이 여성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되도록 싸우는 것이다.” ―“죄가 있는 것은 재판장님의 그 법입니다!” _보비니 재판 지젤 알리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보비니(Bobigny) 재판’이다. 1972년 10월과 11월에 파리 근교의 보비니라는 도시에서 열린 이 재판은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프랑스에서 자발적 임신중단(낙태)이 형사 처분을 받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재판에서 지젤 알리미가 변호한 피고인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같은 학교 남학생의 성폭행으로 임신해 어쩔 수 없이 낙태 수술을 받은 열여섯 살 고등학생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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