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탈식민의 역사를 여는
네그리튀드의 문학과 사상!!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의 고전, 에메 세제르 선집!!
20세기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사상과 문학운동을 이끌었던 거장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의 대표작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1955), 『어떤 태풍』(Une tempete, 1969), 『귀향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1939)이 저작권사와의 정식 저작권 계약을 통해 ‘에메 세제르 선집’으로 묶여 동시 출간되었다. 아프리카 문학 ·문화연구를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해 온 이석호에 의해 번역된 이 선집은 20세기 아프리카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확장시킨, 현대 탈식민주의의 절대적 고전이라 할 수 있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스승이자 동료로서,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사상에 수많은 쟁점과 화제를 낳은 에메 세제르. 그는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기 위해 식민지배자들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었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고유한 삶을 조명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백인들과는 구별되는 흑인들만의 고유한 정신과 주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검둥이’라는 뜻의 ‘negre’와 상태 혹은 성질을 뜻하는 접두어 ‘-itude’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용어 ‘네그리튀드’(Negritude). 20세기 초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담론의 주요 개념으로 등장한 이 용어를 통해 세제르는 서구의 식민주의적 담론에 가려져 있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고통과 희망의 언어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세 작품들에서 세제르가 시도한 것은 네그리튀드를 어떻게 식민주의 담론의 장막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기존 식민주의 담론의 서구중심성을 비판하며 탈식민적 사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이론서인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1권), 셰익스피어의 『태풍』(The Tempest, 1611)을 재구성하여 야만인으로 분류되어 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전복적 주체성을 드러내는 희곡 『어떤 태풍』(2권), 아프리카 흑인들의 경험과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서사시 『귀향 수첩』(3권). 프란츠 파농으로부터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에 이르는 현대 탈식민주의 담론에 사상적·문학적 주춧돌을 놓은 세제르의 이 세 작품들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물음이 관통하고 있다. “흑인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에메 세제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해 나갈 아프리카 흑인들의 고유한 주체성이었다.
세제르의 이러한 사상은 1990년대 후반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의 유입과 함께 한국에 급속도로 소개되기 시작한 탈식민주의 담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의 빠른 유입 속도만큼 초기 탈식민주의 문학과 사상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선집의 출간은 그동안 프란츠 파농으로 대표되어 온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현대 포스트구조주의 담론 이전에 전개된 탈식민주의 사상의 원류를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에메 세제르 선집 1권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 타자화와 위선 속에 숨어 있는 식민주의의 본질을 밝힌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지배이다. 타 인종의 나라는 고로 농노의 나라, 농사꾼의 나라, 산업노동자의 나라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평등을 제거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장하고 법제화하기 위함이다.”(에르네스트 르낭, 『지적 ·도덕적 개혁』 중에서)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을 급진적 정치주체로 규정하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네그리튀드’ 운동을 주도했던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의 거장 에메 세제르. 그는 이 책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기존의 ‘식민=가해’, ‘피식민=피해’의 구도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식민주의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되는 아프리카 민중들의 철저한 타자화라고 말한다. 또한 식민주의만을 따로 놓고 볼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 타자화, 자본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만 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세제르의 이러한 분석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설득력 있는 이론처럼 오르내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사실은 민중의 삶을 간과하는 이론임을 입증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식민지배로 인해 피식민지의 근대화가 실행되었다고 말하지만, 세제르가 보기에 서구 열강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저 민중들의 삶을 더 착취하기 위한 이론이자, 기득권들 간의 결탁일 뿐이었다. 세제르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실 지식인들의 위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식민주의를 민중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만, 서구 열강의 지배 속에서 철저한 타자로 살 수밖에 없었고, 식민지의 폭력 때문에 자신만의 삶을 가질 수도 없었던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공산당원으로 고향인 마르티니크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세제르는 식민주의를 이념의 내면화 문제, 차별과 위선의 문제로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과 자본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계급과 자본의 격차가 발생할 때, 타자화와 차별이 등장하고, 그것이 바로 식민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을 세제르는 잊지 않는다. 당대의 유럽은 히틀러주의로 인한 유럽 내부의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발칸반도의 오래된 갈등, 사그라지지 않는 반유대주의, 두 번의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제국에 대한 욕망이 바로 유럽이 처한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유럽인들은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켜 줄 신대륙이자, 그들의 망명지이며 이차대전의 승리자인 미국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희망에 찬 눈으로 미국을 볼 때, 세제르는 그들의 욕망에 찬 시선에서 식민주의를 읽는다. 결국 자본의 독점이 인종차별주의를 낳고, 위선을 낳고, 다시 식민주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제르는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는 하나임을, 그리하여 자본과 식민주의가 함께하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탈식민주의는 담론 자체의 비판적 분석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모호한 용어로, 혹은 정제되지 않은 애매한 구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탈식민’은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첨예한 정치적 실천이다. 식민주의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저항의 지침을 제시하는 에메 세제르의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을 통해서, 우리는 식민주의를 가로지르는 복잡한 맥락들을 살피고,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식민주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