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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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중세의 결정판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암흑기라는 표현에서 끝없는 공포, 광신주의와 이교에 대한 편협성, 역병, 빈곤과 대량 학살로 인한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쇠퇴기를 떠올린다면 …… 이는 부분적으로만 적용할 수 있다. 그 시대가 남긴 유산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도 사용한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것인 것처럼 아직도 사용하는 중세의 발명품은 끝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 전체 서문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소개] 중세 Ⅰ(476~1000):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 중세 Ⅱ(1000~1200):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 Ⅲ(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중세 Ⅳ(1400~1500):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중세의 모든 것을 다룬 인문 시리즈로, 시기에 따라 총 4권으로 구성된다. 역사와 철학에서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까지 현재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세의 다양한 사건, 사상, 제도, 문화, 예술 등이 촘촘하게 소개된다. 흔히 암흑기라고 알려진 이 시기가 사실은 얼마나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 왔는지, 또 근현대의 여러 분야가 정착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 왔는지를 알려 준다. 기획자와 집필자들의 국제적인 명성,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 등에서 다른 책들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중세의 결정판. [중세 4: 세부 내용] “천 년을 품은 중세, 내일의 역사를 잉태한 과거” 우리 시대의 석학,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산! 1천 년 중세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중세 컬렉션의 마지막 여정 고대의 이상을 계승하고 근대의 새로움을 고취시킨 마지막 1백 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의 마지막 책인 『중세 Ⅳ』가 다루는 1400년부터 1500년까지의 1백 년은 중세와 르네상스가 혼재된 시기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5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어디에서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는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이것이 어느 한 분야만의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15세기에 상업과 무역업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조감으로 본 풍경을 그림으로써 그림의 경계선 너머를 상상하도록 자극했다. 또한 항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는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원거리 여행이 가능해졌다. 여러 번의 전쟁과 종교 불화를 겪으면서도 중세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키웠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근대 국가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들 모두가 르네상스의 문을 연 주인공이다. 중세 역사: 중세를 떠나 근대로 가는 길 15세기는 여러 가지 불안의 징후와 함께 열렸다. 무엇보다 ‘교회 대분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교황청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유럽 사회의 팽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나의 교회, 교회의 보편성이 위기를 맞자 여기저기서 반목이 생겨났다. 1449년에 니콜라오 5세가 유일한 교황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분열은 끝났지만, 과거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교황과 교황청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이상을 준비하고 대책을 제시해야 했으나 자의가 아닌 현실과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다. 종교 불화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기에 종교 재판소와 이단 탄압은 더욱 거세졌으며 마녀사냥이 빈번했다. 이 시대의 표상으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기억해야만 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백년전쟁은 1453년에서야 종결되는데, 줄곧 우위를 점했던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샤를 7세가 프랑스 왕국을 재편성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민족정신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기했고, 열일곱의 문맹 소녀 잔 다르크가 증명해 냈다. 백년전쟁은 봉건제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를 통해 근대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영국의 장미전쟁,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정복,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몰락을 논하지 않고서는 중세의 문을 닫을 수 없다.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사라지면서 시작된 중세는 1천 년 후 동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그 종결이 뚜렷해졌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중세가 열망했던 이상향인 제국과 교회를 하나로 엮어 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1492년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확실한 근대가 열리기까지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의식과 기술의 진일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1455년에 구텐베르크가 종이 양면에 압착기를 이용함으로써 유럽에 이동식 활자를 통한 인쇄술이 도입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처럼 이탈리아의 15세기는 코무네라고 불리는 도시 국가들의 전성기였다. 밀라노, 베네치아, 토스카나 등은 코무네에서 시작하여 참주정, 대공국, 그리고 지역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유럽 전체로 봤을 때는 힘이 약했으므로 유럽 강국들의 전쟁에 여러 번 휘말려야 했다. 그럼에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곤차가 가문의 만토바, 몬테펠트로 가문의 우르비노 등은 경제와 상업, 무엇보다 문화의 성숙을 자랑했다. 이들의 후원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르실리오 피치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같은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들이 탄생했다. 중세 철학과 사상: 능동적인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역할 중세는 신,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벗어나야 진정한 중세를 만날 수 있다. 15세기의 중세는 두 시대가 뒤섞여 숙성된 진정한 과도기였다. 이 시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모두 각광을 받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은 이들 사이의 통일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15세기에 인문주의가 발전하면서 고대 사상과 사상가를 연구하려는 노력이 활발했는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플라톤과 비교되면서 처음에는 대립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신플라톤학파인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인문주의 철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 덕분에 이 두 거장의 사상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고대 문헌들을 제대로 평가하고자 하는 요구에 부응하여 문헌학이 새롭게 떠올랐다. 대표적으로 수세기 동안 교황의 세속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해 온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가짜임을 밝혀낸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고 믿어진 선언의 허구성』으로 문헌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글자 그대로 한 단어씩 번역하던 15세기 이전과는 달리 문장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노력으로 개념적인 내용을 번역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동시에 이미 번역된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쓰인 원전을 직접 읽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개입한 이들이 적을수록 좋았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은 맞지만, 이는 인간이 신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과 세상의 중개자로서 인간이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이와 더불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문헌의 유통 및 확산에도 큰 변화가 찾아오며 지식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 과학과 기술: 익명에서 벗어난 예술가-기술자들의 강렬한 등장 13-14세기에는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