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エッセイ/人文学
2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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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만년에 자신의 철학의 정수(精髓)를 요약하고 쉽게 해설하여 일반인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쓴 철학적 에세이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삶의 괴로움, 삶의 허무, 생존의지, 사랑, 여자, 교육, 죽음, 문예, 윤리, 종교, 정치, 사회에 관한 13편의 에세이와 《나의 반생》이란 자전으로 된 이 책은 학계와 일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의 글은 한편으론 지옥의 사자가 내리는 절망적인 선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인생의 낙오자가 내뱉는 무의미한 넋두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생의 참된 긍정을 위해 한번쯤은 거쳐야 할 부정의 논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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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レビュー

5

目次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7 1. 삶의 괴로움에 대하여 11 2. 삶의 허무에 대하여 51 3. 살려는 의지에 대하여 63 4. 사랑의 형이상학 81 5. 여자에 대하여 127 6. 교육에 대하여 147 7. 죽음에 대하여 157 8. 문예에 대하여(Ⅰ) 166 9. 문예에 대하여(Ⅱ) 178 10. 윤리에 대하여 190 11. 종교에 대하여 217 12. 정치에 대하여 224 13. 사회에 대하여 228 □ 나의 반생(半生) 237 □ 해 설 256 □ 연 보 264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학계와 일반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에세이집 《소품과 보유집》의 역서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만년에 자신의 철학의 정수(精髓)를 요약하고 쉽게 해설하여 일반인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쓴 철학적 에세이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삶의 괴로움, 삶의 허무, 생존의지, 사랑, 여자, 교육, 죽음, 문예, 윤리, 종교, 정치, 사회에 관한 13편의 에세이와 《나의 반생》이란 자전으로 된 이 책은 학계와 일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의 글은 한편으론 지옥의 사자가 내리는 절망적인 선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인생의 낙오자가 내뱉는 무의미한 넋두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생의 참된 긍정을 위해 한번쯤은 거쳐야 할 부정의 논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 쇼펜하우어 연보 | 1788년 2월 22일, 독일 단치히 시에서 출생. 3월 3일, 성 마리아 대사원에서 세례를 받음. 1793년 자유시 단치히가 프러시아에 합병되었으므로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함부르크로 이사함. 1979년 부친과 함께 프랑스 여행중 르아브르에 사는 부친의 친구 그레고아르 드 브레시마르의 집에 남아 불어를 배움. 1799년 르아브르에 2년 동안 머문 후 함부르크의 부모에게 돌아왔을 때는 프랑스 사람이 다 되어 독일어 해득에 곤란을 받음. 함부르크에서 철학박사 룬게의 사숙(私塾)에서 4년간 공부함. 1803년 학자가 되기 위해 김나지움에 진학하려 했으나 유럽 여행을 마친 후 상인이 되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2년간의 장기 여행을 떠남. 네덜란드를 거쳐 영어를 철처히 공부하기 위해 런던 교외의 윔블던에 있던 신부(神父) 랑카스터의 집에 석달 동안 유숙하고 6개월간 런던 체류. 1804년 늦겨울을 파리에서 보내고 봄이 되자 프랑스 남부지방을 여행.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향함. 이어서 단치히로 가서 성 마리아 대사원에서 견신례(堅信禮)를 받음. 1805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긴 여행을 마치고 나서 부친과의 약속대로 상인이 되기 위해 호상(豪商) 이에보쉬의 가게에서 견습 생활을 함. 부친이 창고에서 강물로 추락하여 사망. 모친 바이마르 이주. 1806년 자기 직업이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부친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고민함. 1807년 모친에게 편지로 자기 직업상의 고충을 호소함. 모친의 친구 카알 루드비히 페르노가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학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옴. 고타의 김나지움에 입학. 교장 데오링으로부터 매일 두 시간씩 라틴어 개인 지도를 받음. 1808년 바이마르 김나지움으로 전학. 파소우로부터 라틴어와 희랍어 개인지도를 받음. 1809년 바이마르 김나지움 졸업. 괴팅겐 대학 의과에 입학. 학비를 모친이 부친의 유산 중에서 송금, 쇼펜하우어가 유산의 1/3을, 모친과 여동생이 2/3를 분배받음. 1810년 의과에서 철학과로 옮김. G.E. 슐체로부터 철학을 배우고, 플라톤과 칸트를 철저히 공부함. 1811년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 1813년 베를린 대학에서 4학기를 끝내기 전 전쟁의 불안 때문에 드레스덴으로 갔다가 바이마르의 모친에게로 돌아갔으나 의부와의 불화로 떠남. 〈충족근거율(充足根據律)의 네 근거에 관하여〉를 완성, 예나 대학에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괴테가 이 논문을 읽고 자기의 〈색채론〉 연구에 종사하도록 권고함. 1814년 드레스덴으로 이주. 여기서 도서관과 미술관 등을 이용, 학문과 예술을 연구함. 1816년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를 인쇄하여 괴테에게 보냄. 1818년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완성. 이탈리아로 여행. 1819년 4월, 로마를 거쳐 베니스로 가서 부유하고 지체 있는 애인과 깊은 관계에 빠짐. 6월에 베니스를 떠나 밀라노에서 단치히의 가게(부친의 유산 가운데서 모친과 여동생이 받은 몫의 전부와 그의 몫 일부가 출자되어 있었다)가 파산되었다는 여동생 편지를 받고 자기 재산을 셋이 분배하자는 답장을 보냄. 바이마르로 돌아와 괴테 방문.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 구직(求職) 이력서를 제출. 1820년 3월, 베오크 교수 입회하에 〈원인의 네 가지 다른 종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교직에 취임할 시험강의를 함(이 강의 내용은 베를린 왕립 도서관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음). 베를린 대학에 강사로 취임하여 〈철학 총론――세계의 본질과 인간 정신에 대하여〉를 매주 다섯 시간 강의함. 단치히 가게의 채권자 화해협의(和解協議)에 불응하여 그의 출자금은 건졌으나 이에 응한 모친과 여동생은 출자금의 70%를 성살함. 1821년 〈하나의 가지〉라는 자서전적인 산문 집필. 1822년 〈편지 보따리〉 집필. 1825년 여자 재봉사와의 소송사건에서――여자 재봉사가 쇼펜하우어의 하숙 방 응접실에 함부로 드나들고 잔소리가 심해 그녀를 문 밖으로 떠민 것이 이유――패소(敗訴), 그녀에게 평생 일정액의 부양료를 지불하게 됨.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750부 인쇄한 중에서 600부가 팔려 재판을 계획함. 1827년 친구의 권유로 멕시코의 공채(公債)을 사들였다가 손해 봄. 1828년 《비망록》을 집필. 그는 〈진리를 위해 생애를 바친다〉는 표제를 붙임. 1829년 논문 〈시각(視覺)과 색채에 관하여〉 발표. 칸트의 저서 영역(英譯)을 계획함. 1830년 〈사색〉 집필. 라틴어로 된 〈생리학적 색채론〉 발표. 〈센트 포르스의 예언자〉 번역. ( …이후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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