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는 아직 말소되지 않았다!
80년대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자, 락이 힘을 잃고 댄스음악이 판을 치기 시작한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희미해졌다. 그 즈음 등장한 것이 힙합음악이다. 대부분 10대,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주축이 된 힙합뮤지션들은 락의 유전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체화했다. 그들은 사랑과 이별로 국한된 음악적 소재를 다시 사회적 소재로 확장시켰으며, 무기력한 세대를 질타하는 현대판 음유시인으로 거듭난다.
한국의 힙합음악은 약 1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중 성숙기 몇 년은 지하실의 셀로판조명 아래서 시작한 소년들이 음반차트를 휩쓰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기적의 시대였다. 이 소설은 한국 힙합음악의 발생 초기에서 성장기까지 약 3년 동안의 이야기를, 그 시기에 활동했던 실존음악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이하 진말페)>의 멤버였던 손아람(예명 ‘손 전도사’)의 시각에서 전하고 있다.
언더그룹 <진말페>가 음악을 그만둔 것은 이미 5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힙합마니아들은 <진말페>의 전설 혹은 신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음반 한 장 내지 못하고 사라진 비운의 그룹에게 보내는 아쉬움일까?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힙합세계에서 자리하는 <진말페>의 아우라가 너무 강하다.
청춘의 꿈과 야망을 증언하는 아름다운 성장소설
이 소설은 1998년 <진말페>의 결성 시기부터 그들의 성장과정, 영광과 추락의 순간까지 담아냈다. 아직도 음악판에서 활동하는 실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며, 당시 <진말페>의 멤버인 서울대 공대생 오혁근(예명 ‘오 박사’), 서울대 미학과에 다니는 손아람, 캐나다 유학중인 이하윤(예명 ‘sid’)을 축으로 현실과 허구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변주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한 자전소설이나 음악소설이 아니다. 19세, 20세의 소년들이 왜 ‘랩’을 통해서 젊음을 연소시켰던 것인지, 왜 그들이 ‘기성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음악을 선택했던 것인지, 또한 그들의 젊음이 얼마나 지독했던 것인지를 증언해주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오디션 심사를 맡은 뮤지션들 중 몇이 잡담을 멈추고 흥미롭다는 듯이 혁근을 주시했다. 나는 혁근이 랩에도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자기 가사를 쓰는 날이 오면, 내 친구는 이 공연장 안의 어느 누구보다 더 유명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혁근의 랩 파트가 끝나고 브릿지에 들어갈 때 갑자기 음악이 꺼졌다. 당황하여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머니가 과장된 태도로 박수를 치면서 무대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훌륭해. 진심으로 이곳에서 공연할 생각이었나? 오늘 공연 관람은 무료로 해줄 테니 제발 두 번 다시 오디션을 볼 생각은 하지 마라.”
나는 모욕감 따위는 결코 느끼지 않았다. 대신 무대 위에서 드디어 내려올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패잔병처럼 축 늘어진 채 클럽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우리 뒤를 따라 뛰어왔다.
“손아람!”
나는 2초도 되지 않아 이하윤을 알아보았다. 하윤은 내가 여의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_1권 「왼쪽 세계」46~47쪽
지독한 젊음, 그들이 달려간 비상구
화자이자 주인공인 아람은 신이 평균 이하의 것들을 대충 긁어모아 자신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두 살 때 사고로 왼쪽 청력을 잃었고, 학교 성적은 밑바닥,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는 자신이 당장 죽어버린들 세상이 잠깐 멈칫조차 않을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람은 랩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에 머리를 파묻은 채 마지막 남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날려보낸다. 남은 청력을 다 잃을 때까지 마냥 그러고 살 거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었으니까. 아니, 아무 일도 할 게 없었으니까. 수능 시험을 보고 돌아온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을 털어내려는 듯, 넌 그냥 하고 싶은 거나 하며 살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제발 좀 일찍 들어와 자!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머니가 쏘아붙였다. 반면 아버지는 누가 제발 좀 일찍 자라고 굳이 절규하지 않아도 항상 일찍 잤다. 내 눈에 보이는 아버지는 항상 자고 있었다. 일하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자기 전까지 일하러 갔다. 나는 지난 일 년 간 아버지와 세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입을 굳게 다물자 우리 집에는 대화가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손에는 깎은 사과를 정성스럽게 꾸며 올린 접시가 들려 있었다. 마치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인 것처럼. 내가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방에서는 언성이 높아졌다. 곧 어머니가 상기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 지긋지긋한 TV 좀 꺼.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네가 이 집에 발붙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봐!”
물론 몇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사람이 내가 아닌 어머니라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조용히 일어나서 방으로 걸어갔다.
“대학을 못가면 돈이라도 벌든지! 돈을 못 벌면 대학이라도 가든지! 내가 왜 너희들 때문에 이 고생이냐?”
_1권 「왼쪽 세계」22~23쪽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람의 앞에는 영락없이 사회적 소수자로, 국외자로 떠돌게 될 게 뻔한 인생이 펼쳐져 있다. 그에게는 이 막막한 미래를 헤쳐 나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가 동급생인 혁근과 우연히 마주친 어린 시절 친구인 하윤을 만나 <진말페>를 결성하고, 클럽의 오디션을 보고, 어렵사리 공연 무대에 서고,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읽힐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 모인 동료들 사이에서 공연경력이 가장 짧았다. 해로 꼽아도 1년이 안되고, 공연 일수로 꼽으면 불과 수십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혁근과 나는, 지금까지 태완이나 유엠씨처럼 관중의 넋을 빼놓는 수준의 퍼포먼스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퍼포먼스를 원한다. 그들은 무대에 바라고 있다. 공연장 바깥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원시적 집단광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관객들 스스로 미쳐버리길 원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는 모든 일이 허용된다. 사회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폭력적 농담들이 난무하고, 그걸 들은 여학생들은 웃통을 벗어들고 화답하기도 한다.
그런 관객들이 시디를 돌려 트는 대신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변화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할까? 뒤에 기타를 세우든, 가야금을 세우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관객을 선동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좋은 공연일 수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마에서 삐질삐질 땀이 흘러내렸다. 옆에 서 있던 은교가 황급히 파우더 스펀지를 꺼내 이마에 가져다댔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마리는 첫 방송 때 너보다 더 했어.”
문제는 오늘이 내 첫 공연이 아니라는데 있다.
유엠씨의 마지막 음악이 끝났다.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기 전에 우리를 소개했다.
“다음에 올라올 팀은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입니다.”
…중략…
나는 우리가 주어진 시공간을 남김없이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자의 영혼이라면, 악마보다도 신보다도 먼저 포획해갈 수 있을 것이다. 가사를 잊어먹을 걱정 따위는 이제 하지 않는다. 가엾은 내 귀가 리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