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기다려온 이토록 반가운 악의에 대한 변론
시기, 질투, 분노, 경멸, 앙심. ‘악’의 감정이 삶의 거름이 되게 하는 철학자의 솔루션
간디, 공자, 괴테, 몽테뉴… 12명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나쁜 감정 사용설명서
악감정을 털어내려 하지 마라!
아름다운 정원에는 만발한 꽃들도, 잡초도, 지렁이도 함께 사는 법이니까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만 취사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는 기쁜 일이 닥치고 불시에 분노가, 앙심이, 시기심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 삶이다.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느낄 때 분노한다.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거나, 폄하할 때…. 또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질투를 느낀다. 부모님이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을 때, 절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절친이라 부르기 시작할 때…. 다른 부정적 감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게 아니다. 내 삶이 침해당했을 때 분노하는 것은 내 삶을 아끼는 방식의 하나이며, 평온했던 나의 인간관계에 균열을 내는 이를 질투하고 분노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 감정들은 죄악이 되어 오해받고 있는가?
스와스모어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는 『악마와 함께 춤을』 저자는 간디, 공자, 괴테, 몽테뉴 등 철학자들이 내리는 부정적 감정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며 결국 부정적 감정과 싸우거나 이를 생산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신화에 통렬하게 맞서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부정적 감정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은 그저 내버려두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느껴라. 물론 고통스럽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이유를 찾지 말고 본인을 다그치지도 말라. 없애려 하거나 밀어내려 하지 말라. 꽃이 만발할 비옥한 흙에는 지렁이가 가득한 법이다. 독자라면 책을 덮고 난 후 오해받고 지탄받던 부정적 감정이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알게 될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며 살지 말라. 그곳이 지옥일 테니
어떠한 변명도 옹호도 없이, 악마와 함께 춤을!
괴테는 말했다. “친구가 없는 천국보다 더 큰 형벌은 없다.”라고. 그리고 『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은 후 독자라면 ‘부정적 감정을 외면하는 천국보다 더 큰 형벌은 없다.’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일상을 살다 보면 자연스레 악감정이 치고 올라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차오르고, 타인을 질투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불운을 보고는 쌤통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이 세상을 충분히 인간적으로 살아간다면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평화로울 수 없다. 그건 순수함을 바라는 것이다. 순수하지 않은 채 잘 살아간다는 건 이 세상에 부대끼며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적 경험을 엄청나게 많이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걸 의미한다.” _본문 중에서
하지만 이내 자신을 나무란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이며, 타인의 고통을 보고 어찌 고소하다 생각하는가. 제발 이러한 생각을 멈췄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나아가 자신이 느낀 날것의 부정적 감정들은 되도록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꼭꼭 숨기려 하며, 느끼더라도 이를 자기계발의 연료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다. ‘대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왜 이 감정을 더 나은 삶을 위한 연료로 활용해야 하는가?’ 인생이란 원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아도 원하는 이상의 모습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부정적 감정은 삶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변명도, 옹호도 없이 받아들여도 된다. 『악마와 함께 춤을』에서 저자는 이러한 오해받는 부정적 감정에 대한 옹호와,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부정적 삶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다.
간디, 공자, 니체, 몽테뉴…
12명의 철학자들이 다루는 시기, 질투, 경멸, 분노에 대하여
죄악시되던 감정에 대한 통렬한 도전!
시기, 질투, 경멸, 분노…. 오해받고 질타받던 부정적 감정이 언제부터 죄악이 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러한 감정들은 다루는 철학자들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감정 통제형 성인’과 ‘감정 수양형 성인’. 감정 통제형 성인은 감정을 더 잘 통제할수록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로 분개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 통제형 성인의 대표격인 간디는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무단히 애써야 한다.
반면 감정 수양형 성인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감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이성적 힘이라는 사고를 거부한다. 예컨대 공자가 매우 아끼던 제자를 잃고 애통해하는 것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훈련한다면 병원에서 오래 기다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는 조금만 분노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에는 많이 슬퍼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이다. 이처럼 『악마와 함께 춤을』에서는 여러 철학자들에게 분노,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살펴본다.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란 우리를 늘 배신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크게 분노하기도 하고, 매우 큰 슬픔을 느낄 거라 생각했음에도 덤덤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원하는 대로 감정을 선택하거나, 못 느끼는 감정을 억지로 느낄 수도, 느끼는 감정을 스위치 끄듯 꺼버릴 수 없다는 의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죄악시되던 나쁜 감정에 대한 논의를 펼치며 결국 감정 통제형 성인도, 감정 수양형 성인도 될 필요가 없다고 독자를 설득한다.
인생은 비극과 황홀경의 연속
그에 따라 우리의 자아는 흔들리고 웃으며, 걸작을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인생을 바꿔 놓는 질병, 사랑과 출산 같은 인생의 비극과 황홀경이 닥치면 자아는 산산이 부서지고 우리는 자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늘 유동적이다. 때로는 안정적으로 때로는 모래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자아를 찾는 여정을 계속해야 하며 자아를 사랑해야 한다. 자아를 솔직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가 연약함을 인정할 때 부정적 감정이 찾아온다. 분노를 느끼고,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고, 앙심과 쌤통, 경멸과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 보통 이러한 감정이 비판받는 이유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비교하며 나와 당신 사이에 우위를 매기며 타인을 비웃거나 스스로 작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는 조언을 숱하게 듣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소음이 아니다.
“우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 작품이며 우리가 걸작을 만들고 있는지 망작을 만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진행 상황을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자신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_본문 중에서
비교가 나쁜 것이 아니고,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진짜 문제는 이 감정들을 외면하고, ‘탓’을 하며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예컨대 절친한 친구를 질투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 감정을 애써 외면한다. 혹은 회의에서 나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악당으로 만들기도 한다. 저 사람은 늘 나를 경계해 왔으며 이번 기회에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다는 식이다. 더 나아가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얄미운 이웃의 차를 보다 못해 돌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감정을 오롯이 내버려두어라. 물론 고통스럽고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부정적 감정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지 말고 본인을 다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