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3

가을, 이 계절의 소설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시간만큼이나 공평한 진리가 된다. 반드시 돌봄을 필요로 하면서도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게 또 있을까. 여기 인간의 생애 주기를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보여주며 각각의 소설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돌봄’만큼이나 견고한 ‘연대’라는 것을. 30대의 생활과 연애, 40대의 우정과 진로, 50대의 시선과 도피를 차례로 읽다 보면 금세 가을도 저물어 있을 것이다. 김지연 「반려빚」 너무나 믿고 싶어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마음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사물에 이르기까지.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의 ‘반려’에는 인생을 함께 꾸려나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반려빚」의 정현에게 반려란 전 애인 서일이 남긴 빚, 1억 6천만 원이 전부이다. 다른 반려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목줄을 쥔 쪽이 정현이 아닌 ‘반려빚’이라는 점이다. 생활의 엄격한 동반자가 되어버린 ‘빚’은 자신이 연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는 정현이 꿈속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곧장 집에 있는 커피믹스를 떠올리게 하는 등, 한시도 돈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더욱더 목줄을 세게 움켜쥔다. 하루하루 돈에 쫓겨 사는 정현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자기 할 말만 하는 서일은 사기꾼이나 배신자가 아닌 그저 ‘전세 사기 피해자’일 뿐이고, “네가 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말은 끝끝내 정현을 뒤흔든다. “빚과 상환금, 이자, 신용 점수 같은 단어들이 깃들어버렸을 때 믿음이라는 말의 영역이 어떻게 협소해져버릴 있”는 지에 대해 낱낱이 보여주는 소설은 단순히 청년 세대의 상황을 모사하거나 비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동산 임대 환경과 전세 사기의 피해, 그와 직결된 청년 세대의 부채”(문학평론가 홍성희)라는 시의성 있는 주제 위에 ‘믿음’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건넨다. 마침내 0이 된 기분을 느끼는 정현이 그 이상을 바라지 못한 채로 계속 0인 채로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되찾아야만 하는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문단과 독자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지연은 이번 작품에서도 구체적인 소재와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믿음에 대한 질문을 통해 0이 아닌 0.01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인 것도 같고, 그래서 그게 좌절되면 무척 괴롭겠지만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살아갈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쩐지 ‘정현’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인터뷰 김지연 × 최선교」에서 이주혜 「이소 중입니다」 우회하지도 후퇴하지도 않고 내일을 향해 곧장 가는 일 번역가와 소설가와 시인(가나다순)이 “육지 끝에 살고 있는 철학자를 만나러 가는” 일화로 그리는 「이소 중입니다」는 세 주요 인물의 이름이 아닌 직업으로 지칭된다. 이들이 불리는 순서 역시 “나이순” “데뷔 연도순” “노출되지 않는 욕망의 크기순” 등과 같이 객관적 지표와 구체적으로 상정하기 어려운 조건들로 구분된다. 반려견과 외동딸 그리고 전남편의 아버지를 부양하는 돌봄의 주체이기도 한 이들은 특정 이름으로 호명되는 게 아닌 자신들의 행위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때문에 독자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게 아닌 ‘돌봄’의 구체성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입장에 관해 설명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인물들은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고 각자 가져온 책을 읽는다. 언제부터 번역가의 차 트렁크에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물컹할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것 같기도 하며, 따뜻해 보이기도 하면서 어딘가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그 짐이 무엇인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 역시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내고 앓는 존재를 만나기 위해 정상이 아닌 땅끝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근원적 염려를 블랙코미디적 필치로 탁월하게 형상화한”(문학평론가 강동호) 이 작품은 우회하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고 자신들 앞에 주어진 길을 똑바로 나아간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주혜는 인간의 존재 방식인 ‘돌봄’과 ‘연대’라는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인물의 ‘호칭’을 지우고 ‘행동’에 주목한다.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는 ‘이소(離巢)’ 과정에서 새는 정상으로 도약할 수도, 멀리 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내일을 향해 무심히 걸어갈 것”이다. “연대라는 말만큼 해석이 다양한 단어도 없을 거예요. 저마다 생각하는 연대의 방식과 범위가 달라 자칫 앞으로 한 걸음 가려다 뒤로 두 걸음 가기 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연대란 어느 분야에서든 사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연대는 경제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면모인데요. 경제와 효율의 ‘문턱 너머 저편’에 있다는 면에서 연대는 소설(쓰기)과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인터뷰 이주혜 × 이희우」에서 전하영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열린 결말의, 절대적인 공식이 없는 실험영화 같은 삶 곧 50대를 앞둔 숙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줌마’라는 호칭에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친한 동생 윤미가 손주를 돌보기 위해 괌에 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는 ‘할머니’가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간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 사이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중년 1인 가구’의 삶에 대해 그리는 전하영의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는 날것 그대로의 중년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작품이다. 하지만 프리랜서 작가이자 서평가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숙희 역시 사회적 통념을 의식한 채 어린 애인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숙희 또래의 여성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행적이 아닌 생물학적인 나이로 규정되다 아예 그 주체성이 묵살되곤 한다. “공식적인 사회적 역할 속에서도 많이 배제되고 그녀들의 다양한, 그래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노동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채 ‘없는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숙희가 자기 삶에 안심하고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서로에게 보여지지 않”(문학평론가 조연정)았기 때문이다. 숙희는 젊었을 때도 ‘아가씨’니 ‘언니’니 하는 호칭으로 아무렇게 불리는 게 싫었고, 젊음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젊은 여자라는 프레임이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았다. 숙희에게 필요한 것은 생물학적인 젊음이나 사회적인 안전망이 아닌, 하루하루가 실험과도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이다. 비행 공포증을 무릅쓰고 15년 만에 비행기에 오르는 숙희의 마음은 앞으로의 일생도 스스로 선택해나가겠다는 하나의 다짐이 아닐까.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전하영은 숙희라는 인물의 생애 주기를 통해 가정과 자녀가 없는 중년 여성의 삶을 ‘없는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로 그려냈다. “어쩌면 숙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인터뷰 답변처럼 우리의 삶은 결코 예상대로 흐르지 않기에 애써 자신할 것도 지레 겁을 낼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의 선택만으로 결과가 도출되는 ‘실험영화’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세속적인 성공도 실패도 중요치 않다. “어느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지속되던 그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