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반짝이는 존재로 살기 위한 ‘권리’의 모든 것!
존중받으려면 존중해야 하는 것들
모든 생명은 존엄성을 갖고 태어난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 ‘존엄성’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표현하는 ‘인권’은 곧 ‘인간의 존엄성’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잠시도 쉬지 않고 바뀌며, 움직이고 변화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견고하고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자유와 권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인권 변호사 차병직의 《존엄성 수업》은 인간에게 마땅히 허용되어야 할 자유와 권리, 즉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는 ‘권리’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래동화부터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작품들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서는 인간
인류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갖가지 재능을 한데 모아 오늘의 문명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청사진을 만들고 있다. 그 인간의 재능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성’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은 “인간과 세상이 논리적인 설명대로 설계되어 있고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우주와 삶의 질서는 정말 정연할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어온 주인공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목표의 달성으로 쾌락과 환희를 누리고, 고통과 슬픔은 원인의 파악으로 교정하고, 면밀한 계산으로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 혹은 인류의 집단지성이 꿈꾼 세계는 단 한 번도 도래한 적이 없다. 저자는 “우리가 만들어 본 적도 없다. 이성과 이성이 맞닿는 곳의 문제는 이성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이성이라는 장치를 통해 끊임없이 ‘본질’을 탐구하고 추구하지만, 인간만큼은 본질이 아닌 다른 그 무엇, 즉 ‘실존’부터 접근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은 ‘본질’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인간만큼은 본질보다는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실존, 즉 존재해야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본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 이외의 동물이나 사물들과 특별히 구분해주는 절대적 가치는 없다. 인간이 우주 또는 지구의 보석은 아니다. 인간은 교환가치도 없다. 인간 세계 이외의 존재와 거래조차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존엄하다고 우기는가? 존엄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인간 자신에게로 복귀한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바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온갖 질문들을 정신의 선반에 쌓아 놓는다. 거대한 그 선반이 존엄성의 근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저자가 인간의 존엄성을 책 서두에 배치한 것은, 그것이 곧 인간이라면 존중받아야 할, 하여 모든 사람이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생명권, 평등권, 행복추구권, 신체·양심·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재판권, 아동권, 노동권 등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정신의 선반” 위에 놓인 다양한 기제들인 셈이다.
평등한 인간의 불평등
평등보다 ‘불평등’이 더 자주 호명되는 세상이다. 실제로 세상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다는 것은 무언가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다.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사회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법의 존재가 중요하다.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세상에서는 흔히 “법 앞의” 평등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인간의 평등이 천부적 권리임에도 “법 앞의 평등”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계 만민은 평등하지만 국가라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받는 실제의 대우”가 전제되어야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만민으로서의 평등권을 보장해줄 주체나 체제는 사실상 없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존립하고 평등을 누려야 할 주체들을 “법 앞의 평등”하다고 천명함으로써 평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기회의 균등한 보장”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 평등의 보장”이다. 경우에 따라 균등한 기회는 상대적 평등에 포함될 수도 있다. 즉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현실에서 상대적 평등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절대적 평등은 요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적 평등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평등 문제는 한결 해결하기 쉽다. 상대적 평등이란 차이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차별이 당연시되고 있다.
“인간은 애당초 다르게 태어난다. 외모부터 심성까지 저마다 다르다. 성장하면서 각자의 다름은 점점 다양하게 변화를 거친다. 성격, 자질, 품성뿐 아니라 능력의 차이는 교양, 지식, 관점의 차이로 확산 또는 변천된다. 그것을 개인의 개성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을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만들려면 똑같은 상태에 놓이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똑같은 행동을 하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해야 한다. 몰개성의 군상은 로봇의 세계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밀실과 광장 사이에 선 인간, 그리고 프라이버시
개인과 사회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개인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반대로 사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저자가 열거한 수많은 권리들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프라이버시’다. 사회에 속한 개개의 구성원은 다양한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과 사회 사이의 균형을 스스로 유지해야 한다. “현실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 생각해도 안 되고, 공동체에만 골몰한 나머지 자신을 내팽개쳐도 안 된다.
“잠시도 환경과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방을 원한다. 무수한 외부의 환경이 엿보지 못할 자신의 영역을 꿈꾼다. 그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사회에 적응하고 융화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기만의 것을 가져야만 사회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사생활의 비밀이라고도 하고, 프라이버시라고도 한다.”
흔히 프라이버시라고 표현되는, 즉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은 자기가 비밀로 삼고 싶을 때 비밀로 하고, 밝히고 싶을 때 밝힐 수 있는 “결정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비밀을 간직하다가, 언젠가 필요로 할 때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다. 비밀로 지키는 것도 타인에게 밝히는 것도, 모두 스스로 판단하여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결론이 났을 때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늘 저평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감시 체계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는 사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안전을 도모한다며 곳곳에 설치된 CCTV는 때로 안전을 위해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작동한다. 이렇듯 고도로 발달한 기술 덕분에 감시 체계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꿈꾸며 은둔하고 싶어 하는 꿈과 가능한 신체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일상이 자동으로 처리되는 자동 시스템을 즐기려는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최첨단 시스템을 만끽하려면 자신의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