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중세의 결정판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암흑기라는 표현에서 끝없는 공포, 광신주의와 이교에 대한 편협성, 역병, 빈곤과 대량 학살로 인한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쇠퇴기를 떠올린다면 …… 이는 부분적으로만 적용할 수 있다. 그 시대가 남긴 유산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도 사용한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것인 것처럼 아직도 사용하는 중세의 발명품은 끝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 전체 서문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소개] 중세 Ⅰ(476~1000):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 중세 Ⅱ(1000~1200):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 Ⅲ(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중세 Ⅳ(1400~1500):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2018년 출간 예정)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중세의 모든 것을 다룬 인문 시리즈로, 시기에 따라 총 4권으로 구성된다. 역사와 철학에서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까지 현재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세의 다양한 사건, 사상, 제도, 문화, 예술 등이 촘촘하게 소개된다. 흔히 암흑기라고 알려진 이 시기가 사실은 얼마나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 왔는지, 또 근현대의 여러 분야가 정착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 왔는지를 알려 준다. 기획자와 집필자들의 국제적인 명성,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 등에서 다른 책들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중세의 결정판. [중세 3: 세부 내용] “오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본 중세, 가장 빛났던 천 년”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었던 13-14세기의 중세, 움베르토 에코 사후 출간되는 첫 책! 중세 백과사전 속에 담겨진 빼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향연 신을 떠나 인간에게로 향한 1200년 이후의 중세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말하며 중세를 역병, 전쟁, 학살이 만연했던 어둠의 시대로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에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중세에도 황금기가 있었으며 어느 시대 못지않게 찬란했다. 특히 1200년 이후의 중세는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을 경험했다. 여러 군주국이 형성되고 진정한 시민 계급이 탄생했으며 단테, 조토, 아퀴나스 같은 수많은 철학가와 문학가, 예술가가 활동했다. 안경, 단추, 아라비아 숫자 등 현대의 우리도 사용하는 도구와 관습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중세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들을 깨고 그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 시대와는 무엇이 다른지를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분야로 나누어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온 우리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풀어 나갈 지혜를 엿보게 해 준다. 중세 역사, 유럽 세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13세기는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과 함께 열렸다. 그러나 십자군은 ‘신의 의지’를 제창했던 성전聖戰이 얼마나 변질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는데, 그럼에도 1291년까지 활동이 이어졌다. 이것은 프랑스의 필리프 4세 미남왕이나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군주들이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세력 팽창이라는 서로 다른 주체들의 같은 목적 때문에 13-14세기 내내 영토 전쟁이 벌어졌는데 유럽 세계의 군주들 외에도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나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또한 이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그리스도교 권력은 13-14세기에도 정치, 경제, 사회의 전 영역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조금씩 한계와 문제를 드러냈다. 세속의 정치에 관여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려 했던 교황들의 행동은 반목과 충돌에 휩싸였고,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새로운 탁발 수도회의 성립, 카타리파나 발도파와 같은 이단의 활동,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에서, 심지어는 흑사병 같은 질병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너무나 오랜 기간 때문에 이름조차 ‘백년전쟁’으로 불린 전쟁은 처음에는 봉건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확고한 정치적-사회적 기틀을 갖춘 두 국민 군주국을 탄생시키며 종식되었다. 여기에는 왕위 계승 방법, 용병, 기병과 보병, 신무기, 평화 조약, 국민 군주국 등과 같은 당대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두 나라를 필두로 여러 국가가 차례로 군주국의 모습을 갖추어 가며 법을 강화하고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이탈리아만이 예외로 상업을 통하여 부富를 축적한 자치 도시들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르코 폴로를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는 동방 혹은 넓은 바다로의 활발한 진출도 지나치면 안 된다. 중세에 관한 오해 중 하나가 중세는 여성을 혐오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허약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개념이 정립되었으니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여성의 상속이 관습법 차원에서 인정받았음은 물론 13세기부터 여성들은 통치자부터 수녀원장, 예언가와 이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여성의 섭정 관습도 이 기간에 확립되었다.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합하여 칼마르 동맹을 만들었다. 또한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스웨덴의 비르지타 등은 교회 개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상은 계속되었다. 주거와 관련해서는 도시 자체가 잘 방비된 하나의 거대 주택인 셈이었는데 사람들은 치안을 위해 성채 안 혹은 성문 입구를 따라 주거지를 마련했다. 영주들의 집은 크고 높았으나 가난한 이들의 집은 작고 초라했다. 온 가족이 이불 한 채를 같이 덮고 간소한 집기만 겨우 소유했다. 파스타의 확산으로 식생활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곡물 소비가 빠르게 증가했는데 이것이 질병 확산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13세기부터 노동자와 부유층의 옷차림에 보다 큰 차이가 나타났으며 신분에 맞지 않은 옷을 입는 것은 일종의 괘씸죄에 해당했다. 중세 철학과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재발견의 영향 13세기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했던 기간으로, 신학 중심의 철학을 주창했던 스콜라 철학의 황금기에 해당했다. 스콜라 철학은 주어진 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장과 반론을 계획하고 분석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을 비교한 후에 최종 결론에 도달하는 ‘문답’을 통해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13-14세기 내내 사변적이거나 도덕적인 것부터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묻고 반박하는 토론들이 이어졌다. 특히 고대 철학의 전통적 권위에 의존함으로써 이 기간에 아리스토텔레스 권위가 확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저술이 다시금 라틴 세계에 등장한 것은 번역과 주석 작업 외에도 사회, 문화, 과학 전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토미즘이 절대적이었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프란체스코회의 철학자들은 토미즘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영국에서는 경험주의 사상을 통하여 자연 철학의 여러 문제에 다가서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파급을 주지 못했으나 라이문두스 룰루스와 그가 제창한 ‘조합술’은 17세기 과학 혁명기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것은 물론 현대의 컴퓨터 논리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공식적으로 가톨릭 철학이 등장했던 시기에 이단 논쟁이 뜨거웠다는 것도 흥미롭다. 많은 저술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철학서처럼 유해한 책을 읽어서는 안 되며, 성서와 교부들의 해석, 기도서로 충분하다고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