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 최초의 신산했던 삶과 순정한 꿈의 기록!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적인 동지이며 삶의 동반자 이희호,
파란곡절로 아로새겨진 삶 속에서 희망을 길어내다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 퍼스트레이디인 이희호 여사의 인생행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1971년 대선부터 그는 최고 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으며, 이후 망명.납치.구금.연금 등이 이어졌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계속됐다. 또한 박 대통령 사후 군사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남편의 투옥은 이어졌고, 급기야 그는 ‘김대중 내란 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런 모진 시련에서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가택 연금은 계속되었고, 오랜 기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이처럼 이희호 여사는 정치적인 고난을 많이 겪기로 유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의 동반자이며 정신적인 동지로서 일생을 보냈다. 또한 이 여사는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며 인텔리 여성으로서 가족법 개정, 축첩 정치인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의 여성 인권 찾기에도 많은 노력과 수고를 바쳤다.
따라서 그의 일생을 살펴보는 것은 긴 세월 동안 영어의 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신하여 정계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의 흥미로운 정치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한 궤가 될 것이며, 여성운동이 한국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낮과 밤이 뒤섞인 한국 현대사의 가장 내밀한 기록
_ 파란곡절로 아로새겨진 우리 현대사의 뒤안길에 대해 이야기하다
한국 현대사는 오랜 기간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시간을 걸어왔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혼란한 시간 속에서 집권층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의 독재로 점철된 유신 통치와 제5공화국 시절의 폭풍 같은 정치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으로 떨어졌으며, 거짓을 말하거나 침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민주주의라는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희망의 증거로서 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4월 27일 아침, 우리는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를 했다. 그러나 우리 표를 포함해 2,000여 매가 무표로 처리되었다. 선거관리위원장의 법정 도장이 아닌 다른 도장을 찍은 투표용지였다는 것이다. (…) 개표 감시단을 모집해 부정투표와 개표를 감시했지만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인 데다 개표 참관인마저 회유하고 방해하는 공작 앞에서는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소규모 농촌 투표소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개표 방송조차도 국영방송 하나로 제한하고 문화공보부가 개표 결과를 최종 집계해 발표했다.
― '‘개표’에서 진 1971년 대통령 선거'(109~10쪽)에서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태연하고 결연하게 말했다. 유신 초기의 공포에 떨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식사를 거부하고 금식했다. 그들은 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마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밤늦도록 심문받고 책상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려 해도 전등 불빛이 광포하게 쏟아져 무척 힘들었다.
― '“민주주의가 죽어서 곡을 합니다”'(156쪽)에서
이 책 을 통해 우리는 그 희망의 증거를 발겨할 수 있으며, ‘1967년 7대 목포 총선’ ‘1971년 대통령 선거’ ‘김대중 납치 사건’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굴곡 많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한국 현대사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이 여사가 풀어놓는 그 내밀한 기록을 통해 잃어버린 지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길이 될 것이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의 동반자로 살아온 46년의 기억
_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끈끈한 신뢰의 동아줄
혼란으로 점철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로서 일생을 보낸 이희호 여사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청년 김대중에게 정치가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여성 리더 이희호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두 사람을 동여맨 끈이 되었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는 늘 책을 읽고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그랬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나는 이 비범한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책벌레, 김대중'(65~6쪽)에서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1971년 대선부터 그는 최고 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어 핍박받았고, 박 대통령 사후 군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급기야 ‘김대중 내란 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렇게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해갔다. 특히 이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는 가정사 외에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투쟁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겨 있었다.
이후 이희호 여사는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그가 연거푸 패배하고 1997년 대선 4수를 결심했을 때도 다시 신발 끈을 잡아맸다. 이를 두고 한 지인은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퍼센트는 이 여사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은 드디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주오.”
그의 비장한 결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가 구술하고 나는 받아적었다. 정서를 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종이 위에 떨어졌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우는 내 모습이 처연했던지 남편이 손을 잡았다.
“여보, 우리 1980년 사형선고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 '1992년 대선, 정계 은퇴'(301~2쪽)에서
그의 복귀설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반대했다. 그의 아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도 아쉬웠지만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반대할 줄 알았어요. 나도 생각을 많이 했어요. 허나 지금 북한 핵 문제로 민족의 앞날이 중요한 때인데 정부는 물론 야당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어요. 변명은 하지 않겠소.”
― '정계 복귀를 반대하다'(309~10쪽)에서
이처럼 이희호 여사는 46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독려하고 때로는 비판도 하고 그의 큰 버팀목도 되어주면서, 그의 가장 진실한 모습을 대변해오고 있다.
강행군을 마치고 5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아직 정상회담 중이라고 했다. 2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잠시 휴식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6시 전에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무섭게 외롭다. 그날의 그가 결혼 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