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추천
★ 애니스필드-울프상 수상
★ 미국도서상 수상
거대 서사가 정의한 협소한 미국을 넘어
모든 집단의 ‘역사들’로 미국사를 재조각하다
“손님, 우리나라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한두 번 듣는 질문이 아니지만 저자는 매번 움찔하고 만다. “평생 살았어요. 미국에서 태어난 걸요.” 이렇게 대답하자 택시 안이 급속히 어색해진다.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노동자의 후손이자 이민 3세대인 저자는 택시기사가 자신을 동료 시민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 그의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학창시절에 배웠을 ‘미국사’에는 아시아인의 역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를 좌우해온 강대국 미국의 역사는 구대륙에서의 이주와 영국제국에 대한 저항 그리고 원주민의 정복과 이주민의 동화를 통해 승리와 번영을 누려온 국가 건설의 성공담으로 알려져 왔다. 이 거대한 하나의 역사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흑인과 아시아인, 멕시코인, 유대인, 무슬림, 아일랜드 여성을 비롯한 여러 이주민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으레 미국의 역사에서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다르고 열등한 ‘타자’로 등장한다. 어느 쪽으로든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이민자 후손으로서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미국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다양한 집단들의 절망과 꿈, 희생과 성취가 깃든 지난한 시간이었는지를 강조하며 미국사는 비유럽계 미국인들의 ‘역사들’로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주’와 ‘정착’을 중심으로 미국사를 엮은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이다.
‘미국’ 그리고 ‘미국인’은 누구인가?
‘이주’와 ‘정착’의 역동이 만든 나라 미국
이민자들에게 줄곧 ‘무임승차자’, ‘자국민의 안전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자’의 이미지를 씌우는 반이민 정서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현실과는 달리 이 책은 값싼 노동력으로 미국 사회의 근간 산업을 떠받치며 지금까지의 미국의 풍요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이민자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미국 사회가 여러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한 까닭에 오늘날 미국인의 조상을 추적해보면 그중 3분의 1은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다. 흑인, 라티노, 아시아계, 북미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미국사’와 ‘미국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 그리고 ‘미국인’은 누구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미국의 역사 내내 중추적 소수 집단이었다.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던 영국인들은 순전한 백인 세상을 원했기에 처음에는 백인 노동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백인 노동자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들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린다. 이들이 찾은 대상은 장차 노예가 되어 무기 소유가 금지될 사람들이었다. 노예제가 시행되던 시기는 물론 노예제가 종식된 후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는 인종 분리와 법외 처형, 인종 폭동으로 이루어진 암울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미국의 제1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향해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많은 유럽 이민자들보다 더 먼저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금광 노동자 또는 철도 노동자로 와서 후에는 농장과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임시 노동자로는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영주민의 신분으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경제 불황기가 되자, 미국 의회는 중국인입국금지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서구에 의한 강제 개항을 겪으며 본토에서 살기 어려워진 일본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대거 유입되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일군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쓰디쓴 처지를 일찍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40년대, 정부는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수용소로 보내 죄수처럼 감시했다. 그들 중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한국에서는 1884년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갔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있었고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계약노동자와 가족 7,000여 명, 그리고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이들 노동자와 결혼한 신부 1,000여 명의 집단 이주가 있었다. 이후 1965년까지는 사실상 아시아계의 미국 이민이 막혀 있었지만 이 시기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약 6,000여 명)과 미국 가정으로 입양된 아동(10만 명)이나 혼혈 아동은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1965년에는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에도 이민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국계 미국인의 수도 해를 거듭하며 급증했다.
1975년에는 수만 명의 베트남 난민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하면서 다시 한번 아시아계 이민 물결이 밀려왔다. 한국, 필리핀, 인도, 캄보디아, 라오스를 비롯한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민족 집단이 되었으며, 2050년경에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아일랜드인들은 19세기에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굶주림과 집 없는 신세에 내몰려 미국으로 온 400만 명은 가톨릭 신자로서 개신교 사회에 정착하고자 했기에 적개심과 편견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계 이민자와는 달리 백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시민이 될 수 있었다(1970년 귀화법에 따라 백인 이민자만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1900년경이 되자, 아일랜드계 이민자는 중산층에 진입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유대인들도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다수를 차지한 비유대인이 소수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조직적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의류 공장이 빼곡한 뉴욕시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 유대인 여성들이 노동에 뛰어들었다.
멕시코계 미국인은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1848년에 처음으로 미국의 일원이 되었다. 멕시코인이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국경이 멕시코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날 멕시코계 미국인의 대다수는 이민자의 후손이다. 멕시코인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고 일자리를 찾고자 여전히 국경을 넘어온다. 서류를 갖추지 못해 미국에서 소위 “불법 체류자”로 불리는 사람 대부분이 멕시코 출신이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도 1898년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 시민이 되었다(그러나 대통령 및 의회 선거권은 행사하지 못한다). 그들은 20세기 중반부터 그들의 터전을 떠나 미국 본토로 이주하고 있다. 이제는 카리브해의 섬 푸에르토리코에 남은 푸에르토리코인보다는 미국에 사는 푸에르토리코인이 더 많다.
무슬림도 여러 나라에서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이 되어 들어온 사람들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반무슬림 정서와 폭력,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연해진 현실 속에서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북미 원주민의 경우는 미국 사회의 모든 집단과 다르다. 그들은 유럽인이 오기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던 토박이 아메리카인이다. 유럽인은 그들에게 ‘야만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땅을 무력으로 빼앗았다. 인디언 토벌 작전을 이끈 군인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백인은 인디언을 통치하는 것이 곧 문명의 진보라 여겼으나 인디언에게 “유럽사람은 여전히 이방인이며 외지인”일 뿐이다.
일을 찾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이들 집단은 서로 만나고 섞일 수밖에 없었으며, 종종 인종적 갈등에 말려들었다.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열악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흑인과 아일랜드인의 반목이 대표적이다. 아일랜드인은 자신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자신은 미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배 계급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막고 경제적인 이득 또한 취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노동자 계급 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용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맞서 투쟁을 벌이면 지배 계급은 더 저렴한 중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