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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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의 열일곱번째 책 『사씨남정기』가 출간되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 연간의 관료 문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쓴 한글소설로, 그의 또다른 작품 『구운몽』과 함께 17세기 소설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근래 SBS 드라마 에 『사씨남정기』가 나라 전체에 유포되어 장희빈에 대한 악소문이 퍼지면서 장희빈이 궁지에 몰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맞이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김만중이 지었다고 널리 알려진 소설이다. ◎ 줄거리가 어떻길래… 청렴한 집안의 딸인 사씨(謝氏)는 미모가 빼어나고 품행이 바르다. 유소사(劉少師) 집안의 유연수에게 시집을 왔으나 후사가 없어 남편에게 첩을 들일 것을 권한다. 그렇게 새로 들어온 첩 교씨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씨를 모해하기 시작한다. 여러 차례 거듭된 교씨의 지략으로 인해 사씨는 음란한데다 교씨의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안에서 쫓겨난다. 오갈 곳 없어진 사씨는 배를 타고 남행한다. 남행길에서 여러 고비를 넘긴 사씨는 죽기로 결심하나 주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다. 그사이 사씨와 마찬가지로 교씨의 모함을 받아 남쪽으로 유배를 왔던 남편 유연수는 교씨 일파에 쫓겨 죽을 위기에 처한다. 마침 같은 곳에 있던 사씨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나라의 정세도 바뀌어 다시 황제의 신임을 얻고 벼슬에 복귀한다. 사씨 역시 유씨 집안의 며느리로 돌아오고, 교씨는 징치된다. 유씨 집안은 가정의 평화를 되찾는다. 『사씨남정기』는 정말 장희빈 사건의 패러디인가? 『사씨남정기』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목적소설’로 분류되어왔다. 실제로 서인(西人)이었던 김만중은 남인(南人)이 지지하는 장희빈이 왕후가 되는 것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갔다. 정실부인 사씨가 첩 교씨의 모해로 쫓겨나고 교씨가 정실부인이 되는 작품 내용은 이러한 정치적 사건을 빗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역자 류준경 교수(성신여대 한문교육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견해를 곧바로 수용하기엔 몇 가지 난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만중이 숙종을 회유하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창작했다면 왜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썼는지 의문스럽다. 당시 한글은 부녀자들이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파급될 효과를 예상했다면 응당 양반 사대부들이 사용했던 한문으로 썼을 것이다. 또 장희빈을 교씨에 빗대고 남인을 악당에 빗대었다면 남인이 실권을 잡고 있던 정황상 정치적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씨남정기』와 관련해서는 당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만중이 장희빈의 등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간 것은 『사씨남정기』를 짓기 이전의 일이다.) 김만중을 가까이서 모셨던 종손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김만중 사후에 국문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옮기고 서문을 썼다. 그러나 서문에 이와 관련된 아무런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사씨남정기』가 숙종에게 간언할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김만중의 의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한데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이다. 『사씨남정기』가 정치적 목적 아래 지어졌다는 속설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그러나 이는 『사씨남정기』가 지어진 지 100년이 지나 쓰인 것으로, 『사씨남정기』의 작자를 김만중이 아니라 김춘택이라고 하는 등,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사씨남정기』가 장희빈 사건을 패러디한 목적소설이란 인식은 소설이 창작되고 한참 뒤에 만들어진 소문이라고 봐야 옳다. ‘권선징악’이라는 뻔한 결말, 그 너머의 의미 『사씨남정기』가 정치적 사건을 다룬 목적소설이 아니라면 김만중이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익히 배운 대로, 선한 자가 복을 받고 결국 승리한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사씨남정기』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야기일까? 역자는 지금까지 작품 외적 요소에 집중하느라 놓쳐왔던 부분에 다시 눈길을 돌린다. 17세기에 창작된 소설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조금은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정말 현실에서 복선화음의 구도가 실현될까? 선한 자가 복 받기를, 끝내 당위가 승리하는 현실을 꿈꾸지만 현실이 정말 그런 것은 아니다. ‘선’이 끝내 승리한다는 것은 통속적인 바람일 뿐이기도 하다. 이 점을 『사씨남정기』의 작자 김만중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진지한 물음을 김만중은 사씨의 삶 속에 투영해놓고 있다. (435쪽, 해설 중에서) ‘선한 자가 승리한다’는 결말이 현실에서 언제나 유효하지 못함을 김만중 역시 알고 있었다고 역자는 말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사씨가 승리한 결말이 아니라 작품 내내 사씨가 겪는 고난 그 자체다. 저자는 ‘원칙에 맞게 행동해도 삶에 고난이 계속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난으로 얼룩진 삶도 좋은 삶일까?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사씨 삶의 비극적 면모가 최고조에 이른다. 항상 도덕적으로 살았지만 남은 것은 고난뿐이고, 오히려 악행을 일삼은 자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다. 물론 이후 악행이 징치되고 사씨의 영광스런 복귀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통속적인 결말일 뿐이다. 여전히 당위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주체의 문제는 해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사씨의 영광스런 복귀가 이루어지고, 사씨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관음찬」을 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원칙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했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씨의 삶은 외부적인 규율을 따른 삶이 아니라 자신이 찬양한, 자신이 내면화한 가치를 구현한 삶이 된다. 이때 사씨는 진정한 도덕적 주체가 된다. 자발적으로 인정한 가치를 스스로 구현하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세속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올바름의 구현에 있는 것이다. (435쪽, 해설 중에서) 김만중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선한 사람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에 관계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주체성 앞에서 세속적 성공과 실패, 즉 부귀영화나 고난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결말만 보고 책의 주제를 ‘권선징악’으로 치부하기에 『사씨남정기』는 억울하다. 뻔한 결말이라는 편견에 구애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의 맨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사씨남정기』를 다시 읽어야 하는 또다른 이유 『사씨남정기』를 다시 읽을 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씨남정기』는 저자와 표기 문자(한글)가 알려진 고전소설이다. 김만중의 또다른 작품인 『구운몽』만 해도 원본이 한글로 쓰였는지 한문으로 쓰였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다. 고전소설 중 저자와 표기 문자를 모두 아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만중이 창작했던 소설의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은 원본을 한문으로 옮기고, 그 한문을 또 국문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내용에 많은 변이(變異)가 일어났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생겼다. 저자를 알지만, 저자의 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를 알 수 없는 소설이라면 대사가 풍부하고 내용에 결락이 없으며 오탈자가 적은 이본을 선본(善本)으로 삼아 읽으면 된다. 그러나 저자가 분명하다면, 최초의 버전, 즉 원본이 어땠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이본이 중요한 이유다. 그간 연구자들과 독자들이 택해 읽은 이본은 바로 김만중의 종손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김춘택 한역본(漢譯本)’이다. 김춘택은 『사씨남정기』가 국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