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형이상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전복적 인생지침
리처드 테일러는 철학책을 읽는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대표 저서를 통해서다. 형이상학 분야에 대한 기여로 미국 현대철학에 이름을 남긴 그는 철학이 아닌 전혀 다른 두 분야 책으로도 주목받았다. 먼저는 종교, 관습 등에 묶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에 대한 분석이다. 불륜을 주제로 사랑과 결혼의 본질에 접근한 《결혼하면 사랑일까(Love affairs)》,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인생 목표였던 ‘탁월성’을 바탕으로 ‘엘리트주의’를 주장한 이 책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 등이다. 모두 사회 통념이나 정치적 올바름 차원에서 볼 때 비난받기 쉬운 주제와 내용이지만 그는 디오게네스처럼 흔들림 없고 소크라테스처럼 명쾌하다. 덕(virtue)을 윤리의 기본으로 삼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개인적 탁월함을 추구했지만 유대-기독교는 그 가치를 완전히 앗아갔다. 이 책의 원제는 《자부심 회복하기: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덕(Restoring Pride: The Lost Virtue of Our Age)》이다. 1996년에 출간되었으니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지은 마지막 일성 같은 책이다. 관습에 발맞춰 자신의 삶을 사회의 선택에 맡긴 사람들을 그는 ‘자발적 노예’라고 강도 높게 지적한다. 한편 리처드 테일러는 세계적인 양봉가로 ‘탁월한 삶’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봉의 기쁨(The Joys of Beekeeping)》 등의 저서에 독자들은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자신에 대한 정당한 사랑”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저자가 드러내놓고 ‘엘리트주의’라고 전제하는 자부심(pride)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탁월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자부심은 ‘자신에 대한 정당한 사랑’이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정당한’이다. 탁월함만이 정당성을 부여한다.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의 그 자부심, 자존심, 자만심이 아닌 것이다.(당연히 이 엘리트주의는 인권이나 민주적, 법적 평등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자부심이 유명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며 눈에 띄는 업적이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 교사가 그 예가 될 것이다. 탁월함은 유명세가 아니라 자부심을 준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박수갈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 때문이다. ‘어떤 행동의 아름다움은 그 행동의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특성에 있으며, 아름다움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43쪽)
‘선한(good) 사람’ 혹은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타인에게 대한 자비심, 남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나타낸다. 이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온순하고 가난한 사람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자들은 ‘선함’이라 하면 언제나 개인적 탁월성을 염두에 두었다. 가령 플라톤에게 좋은 통치자는 공명정대한 사람인 식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부와 명예처럼 허울만 그럴 듯한 외적인 것을 뿌리치고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고귀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예술이 되는 삶’을 언제든 다시 시작하고 창조할 수 있다.
신중함을 갖춘 예의는 왜 필요한가?
자부심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의 문제인 반면, 예의는 남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의 문제다. 충만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남과의 관계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자기애의 바탕이 되는 창조적 성취를 이룸으로써 아주 귀중한 자산을 갖게 되지만 완전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은둔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그들이 필요하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사랑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남과의 관계를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예의는 예절이 아니다. 예절은 어떤 상황에서 기대되는 말이나 행동과 관련이 있을 뿐이지만 예의는 인간에 대한 ‘신중함’이 필요하다. 예의의 유일한 규범인 신중함은 한마디로 자신이 상대의 처지에 놓였을 경우를 충분히 고려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령 죽음, 사별, 파경, 추문을 당한 상대에게 어리석은 침묵만 지키는 것은 탁월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2부에서 저자는 일상 사례를 통해 인간성의 진정한 깊이를 보여준다.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테일러가 자부심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쓴 이유는 결국 ‘행복한 삶’의 권유에 있다. 자부심과 행복, 그리고 예의는 떼놓을 수 없다. ‘행복은 개인으로서, 즉 창조적 활동이 가능한 사람으로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어떻게 얻는가? 이 두 질문은 고대 도덕철학자들이 품은 근본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현대의 ‘행복’과는 꼭 맞아떨어지는 말이 아닌데, 행복은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거나 종류가 여럿인 기쁨과도 다르다. ‘어린아이의 행복’이라 할 때의 편히 지내는 상황을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라 하기도 어렵다. 행복은 또한 소유나 명예와 같은 말도 아니며 단순한 감정보다 훨씬 지속적인 상태다.
저자는 이처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위대하고 궁극적인 가치, 어떤 사고나 재앙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속적인’ 행복을 그려낸다. 행복은 오히려 ‘건강’에 가깝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자다운 결론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창조력이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하지만 성취라는 개념은 기능과 떨어져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건강을 성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함께 창조적 활동을 성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