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국을 다시 생각한다
1부 한국의 과거
한국의 이념: 세상에, 홍익인간이라니
한국의 신화: 단군신화를 생각한다
한국의 고대: 삼국시대라뇨
한국의 고전: 역사책을 다시 읽는다
한국의 국가: 전염병과 국가
한국의 임금: 왕의 두 신체
한국의 불교: 역사 속의 불교
한국의 정치공동체: 성군은 없다
한국의 보편과 특수: 천주당에 가서 그림을 보다
한국의 유사종교: 유교랜드
한국의 노비: 노비랜드
한국의 독립운동: 미시적 독립투쟁을 찾아서
한국의 식민 체험: 침탈, 동화, 정체성
한국의 정치신학: 님의 침묵
2부 한국의 현재
한국의 군사정권: <서울의 봄>과 쿠데타
한국의 민주주의: 소년이 온다
한국의 혁명: 혁명을 끝내는 법
한국의 시민사회: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찾아서
한국의 근대화: 이것이 한국의 근대화다
한국의 대학: 자유의 궤적
한국의 청년: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한국의 어른: 환멸에 맞서는 안티테제
한국의 이민: 테세우스의 배는 어디에
한국의 사진: 한국 주제의 전시에 가다
한국의 건축: 자유의 여신상을 보다
3부 한국의 미래
한국의 소원: 누군가의 소원을 본다는 것은
한국의 기회: 어떤 행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개혁: 지금과 다른 삶이 합리적이라 느껴질 때
한국의 선택지: 주어진 선택지에 갇히지 말기를 기원한다
한국의 새 이름: 그것은 구성된 것이다
한국의 기적: 기적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보수: <그랜 토리노>를 권한다
한국의 멸망: 공동체의 생멸을 생각한다
에필로그: 고통을 사랑하십니까
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 社会科学/人文学
300p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대개 위기의 순간에 제기된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낯설고 특이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선다. 2024년 12월 3일, 한밤중에 단행된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 이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한국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익숙한 관점이 무너지고,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현실 속에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다시 사유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거침없는 상상력과 정교한 논리,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깊은 사유의 장으로 이끌어온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붙잡고,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읽어낸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그 말하기의 시작이다. 김영민 교수는 이번 책에서 우리가 한국을 ‘이해해온 방식 자체’를 처음부터 되묻고,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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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レビュー
40+目次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한국이란 무엇인가”
서울대 김영민 교수, 한국의 정체성을 다시 묻다
“2024년 12월 3일, 한국은 불시착했다”
지금, 한국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대개 위기의 순간에 제기된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낯설고 특이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선다. 2024년 12월 3일, 한밤중에 단행된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 이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한국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익숙한 관점이 무너지고,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현실 속에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다시 사유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거침없는 상상력과 정교한 논리,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깊은 사유의 장으로 이끌어온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이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을 다시 붙잡고,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읽어낸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그 말하기의 시작이다. 김영민 교수는 이번 책에서 우리가 한국을 ‘이해해온 방식 자체’를 처음부터 되묻고,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안이한 언어와 게으른 상상력을 넘어
한국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다
정체성을 찾는 일은 공동체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체성’이라는 단어마저도 너무 익숙해져 깊이 고민하지 않고 지나치는 개념이 되었다. 김영민 교수는 이 질문을 보다 근본적으로 던진다. 지금, 우리가 ‘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익숙하게 우리를 설명해온 고정된 이야기들은 한국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김영민 교수는 기존의 언어가 만들어놓은 한국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그 틈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한국의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그는 책에서 홍익인간부터 계엄의 밤까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변화한 한국을 돌아보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질문조차 하지 않는 개념들을 흔들고 새롭게 세운다. 단군신화의 낡은 관점을 갱신하고, 식민 체험의 복잡성을 재조명하며, 미시적 독립운동의 존재를 새롭게 이야기한다. 나아가 한국의 시민사회와 대학의 의미를 다시 묻고, 청년과 어른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해부한
‘한국’이라는 사유의 대상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과거’, ‘한국의 현재’, ‘한국의 미래’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단순한 시간 순서의 기술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를 ‘시간의 층위’를 빌려 해부하는 시도에 가깝다.
1부 ‘한국의 과거’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믿어온 개념들—홍익인간, 단군신화, 삼국시대, 불교와 유교, 노비제도, 식민 체험 등—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한다. 김영민 교수에 따르면 단군신화는 외부 문명에 의해 정복당한 민족의 기억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신의 권위를 끌어온 정치적 서사일 수도 있다. 한편 ‘삼국시대’라는 개념은 김부식이라는 고려 시대 엘리트에 의해 제시된 하나의 관점에 불구하며, 실제로는 수십 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대였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욕망과 권력이 재구성하고 해석하고 정당화한 ‘기억의 서사’임을 일깨운다.
2부 ‘한국의 현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온 현실의 구조적 취약함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정당 정치의 무능과 정체, 언론의 불신, 교육 제도의 실패, 개혁 담론의 무기력함 등 한국 사회를 이루는 제도적 기반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진단하는 김영민 교수는 이런 현상들을 단순한 기능적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개혁’, ‘민주주의’, ‘정의’라는 말들이 점점 기존 의미를 잃어가고, 낡은 제도 역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무너지는 언어와 제도 사이에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볼 것을 요청한다.
3부 ‘한국의 미래’는 단순한 청사진 제시나 희망적 전망 대신,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사유의 실험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규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청년과 노인, 도시와 농촌, 중산층과 주변부로 나뉜 채 대립만 남아버린 상황은 바뀔 수 있는가? 김영민 교수는 말한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창한 이념적 선언이 아니라 일상과 정치를 다시 연결하고, 고통과 공동체를 재해석할 수 있는 감수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라고. 나아가 그는 한국인의 소원, 기회, 가능성을 어떻게 다시 구성할 것인지, 한국이라는 이름이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들이 마련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한국은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
한국을 이해하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다
한국에 대한 정체성 탐구와 새로운 인식은 곧바로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국이란 무엇인가》의 프롤로그는 2024년 12월,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 선포’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김영민 교수는 이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치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우리의 일상이 어떤 허약한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를 고발한다. 경제성장, 문화의 세계화, 민주주의의 성숙… 겉보기에는 ‘한국의 기적’이라 불릴 만한 성취들 이면에서 작동하는 언어의 실패와 법치의 후진성을 발견한다.
김영민 교수가 보기에 지금 한국은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이며, 문제는 그 복합성을 감당하기에 기존의 언어가 너무 낡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한국을 이해하는 데 사용해온 기존의 관점을 해체하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궁극적 목적도 바로 그 새로운 언어에 대한 탐색이라고 말하는 그는 새로운 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새롭게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는 근시안적 질문을 넘어
지금 이곳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필요한 시간
김영민 교수는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는 소모적인 정치 예측보다 “우리는 왜 지금 이 모습의 한국을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 개편이 아니라 사유의 전환, 정치적 성과가 아니라 언어의 발명, 지도자의 등장보다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재구성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단지 현실 분석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지형을 넓히는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은 대화의 시작이다. 고정된 언어와 박제된 개념을 넘어서, 다시 한국을 이야기하고 새롭게 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익숙한 것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의 분기점에서 우리는 거듭 질문해야 한다. 답이 보이지 않을수록,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이 책은 그 질문의 끝에서 다시 시작된다.



No name
4.5
작가님의 선을 넘을 듯 안넘을 듯한 비유들이 보였는데 이마저 한국이란 무엇인지, 한국 남성이란 무엇인지, 한국 남성 교수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그래서 별 반개는 제했어) 읽는 동안 움베르토 에코의 [가재걸음],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같은 책들이 생각났다. 과연 이 책도 수십년 후에 읽었을 때 어떻게 이런 글을 그 시절에 쓰실 수 있었을까? 라고 감탄을 하게 될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나, (또) 과연 그 때도 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실로 시의와 시기 적절한 책이었다.
요술공주람보
4.5
김영민 교수는 특히 비유나 예시를 들 때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 호흡과 위치, 장단도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면을 바라보는 눈이 좋다. 자신은 그런 삶을 추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쉬지 않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 (이하 발췌) 나는 올해도 새해 결심을 해본다. 제법 나이 든 인간으로서 나는 시간이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따라서 부질없는 집착들로부터 놓여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올해 안에 무엇을 기어이 끝내겠다는 결심 같은 건 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학위논문을 쓰는 학생들에게나 어울린다. 한편 올해가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일들은 올해 안에 하려 할 것이다. 고시 공부를 위해 연애를 90세 이후로 미루는 청년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일들은 그 시절에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게 되곤 한다. 그런 것들 말고는 나의 일상을 수호할 것이다. (중략) 나는 왜 나일까 같은 질문은 그만하고 사랑이라는 기적에 대해 과감할 것이다. 이러한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크게 탓하지 않을 것이다. 자칭, 타칭 진보 정부는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매우 극적인 과정을 통해 집권했다. 지난 정권의 과오가 분명한 만큼, 그 과오로부터 과감히 결별할수록 현 정부의 정당성은 강화된다. 그 과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현 정부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만약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지난 정권의 과오가 그 역사서에 집어넣고자 한 특정 메시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현 정부는 역사서에 그와는 다른 메시지를 집어넣으려 들 것이다. 만약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지난 정권의 과오가 역사를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이용하려 든 시도 자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현 정부는 가능한 한 역사를 정치가가 아닌 역사가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할 것이다. 남의 음식까지 먹어치우지 않는 태도가 나의 자제력을 나타내듯이, 역사가의 몫까지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정치권력의 성숙함을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두 번 죽는다. 평소에 입고 먹고 싸고 말하고 숨 쉬던 물리적 존재는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존재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애도하고 계승하고 보내주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누군가 그를 계승하기를 포기할 때, 마침내 떠나보낼 때 그는 비로소 죽는다. 마침내 무(無)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는 그를 되살릴 수 있는 타자가 없을 때 비로소 완전히 죽는다. 두 번째의 생사는 자신이 아니라 남은 타자에게 달려 있다. 내가 만나본 지구인들은 약간의 책임감과 또 약간의 소유욕과 또 약간의 질투를 동력으로 해서 성실히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주말이 되면 방 안에 엎어져 뽁뽁이나 터뜨리며 휴식을 취하는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간혹 제법 그럴싸한 야심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살아 있기에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경우든 종종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위대한 성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조시대의 성군이랑 완전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자아 수양을 통해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날로 먹을 수 있다면 날로 먹으려 드는 존재, 도저히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야 간신히 노력을 시작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무능과 이기심을 반성하기는커녕, 남을 탓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반성을 하더라도 자신이 반성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전시하려 드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논리를 <님의 침묵> 해석에 적용해보자. 정순처럼 늘 조국이 자신의 곁에 함께했을 때는 애국심이라는 욕망이 약하기 마련이다. 늘 공무원이 아른거리고 세금까지 걷어간다면, 조국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즉 조국이 건재할 때 애국의 욕망은 약하다. 그렇다면 애국의 욕망은 언제 가장 강한가? 마찬가지 논리고, 조국이 멀쩡하지 않을 때, 혹은 갓 멸망했을 때 가장 강하다. 연정을 해소할 대상이 사라져버렸을 때 연정이 가장 강하듯, 애국의 욕망을 해소할 대상이 망해버렸을 때 애국의 욕망이 가장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에 연연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한갓 생존을 넘어서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넘어서게 하는 고귀한 힘을 한강은 양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이 고개를 들 때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87쪽) 그토록 생존에 연연하던 존재가 문득 혼자만 살아남을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162쪽) 이 견결한 영혼이란 것은 동시에 너무나도 가냘픈 존재. 그래서 묻는다. “그런 무슨 유리 같은 건가.”(130쪽) 영혼은 유리 같은 것이기에 깨지기 쉽고, 깨지기 쉽기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것. 영혼이 깨지는 순간조차 그것은 영혼의 부재 증명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다. 약하지만 투명한 무엇인가가 기어이 존재했다는 증거. 인간이 짐승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증거. 혁명 이후의 일상을 살아보면 선과 악은 그다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중략) 2016년 촛불 시위는 정말 ‘혁명’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이 약속한 세상은 정녕 도래했을까?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외칠 뿐이라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오늘날 대학에도 자유가 있다면,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유나 존재의 고독에 직면할 자유가 아니라 이 압도적인 생존 압력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처럼 보인다. 목전의 생존에만 집착한다고 과연 진짜 생존할 수 있을까. 생존 너머를 상상해야 생존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입학을 축하한다. 이제 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은 더 이상 당신 편이 아니다. 대학 시절의 공부를 인생의 필리버스터라는 자세로 임하라.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플랭크를 하라. 시간이 실연한 거북보다도 늦게 갈 것이다. 사회학자 베르너 스타크는 “이데올로기는 거짓말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거짓말쟁이는 최소한 냉소주의에라도 이를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는 단지 바보로 남을 뿐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마치 도건이 의사 행세를 할 때 자기가 의사가 아니라 가난한 실업자라는 진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남을 호도하는 것이 거짓말쟁이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 혹은 사이비 종교인은 다르다. 그들은 남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여야 한다. 자기가 먼저 속아야 자신감을 가지고 남들을 속일 수 있다. 인간은 뭔가 희망하는 동물이다. 지금 당장의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동물이다. 그 소원이 가진 동원의 힘은 굉장하다. 인간에게는 소원이 있기에,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분투한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인가 소원하는 한, 아무것도 소원하지 않는 존재와는 다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당장의 현실뿐 아니라 그가 소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저질 정치인들이 난무하는 원인으로 욕망, 기회, 능력을 거론했다. 일단 적임자를 선출할 기회가 드물다. 적임자는 진흙탕이 된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물론 정치판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적임자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가 정치판에 들어가서 얻을 것이라고는 피곤함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임자는 오히려 은거하는 경향이 있다. 그뿐인가. 좋은 정치인을 뽑고 싶은 욕망도 없다. 탁월한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끓어올라가서 어떻게든 그의 흠을 잡고, 비방하고,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시기심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범용한 인물이 정치계에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선출된 정치인은 자기 능력에 넘치는 횡재(?)를 한 셈이 되니, 다시 오기 어려운 그 자리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니 오래 권세를 누릴 가능성이 있다. 그뿐인가. 좋은 정치인을 판별할 능력도 부족하다. 겉으로 드러난 후보 커리어가 좋아봐야 그것이 진정 그의 능력을 반영하는지 불확실하다. 연설 솜씨가 뛰어나보아야 과연 그가 충분한 행정 능력이 있는지 불확실하다. 그 개인은 훌륭할지 몰라도 일을 함께할 그의 추종자들이 부패한 이들인지도 모른다. 누가 좋은 정치인인지 판별하기 이처럼 어려우니, 그저 개인적인 인연이 있거나, 자신에게 편의를 제공한 적이 있거나 제공할 것 같은 사람을 뽑게 된다. 저출산이든, 부동산 투기든, 입시 과열이든, 수도권 집중이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다수가 느꼈기에 거대한 사회 현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게 합리적이었기에, 그렇게 사는 한국인이 탄생했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되었을 때 그런 한국 사회가 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때 비로소 미래의 한국인이 출현하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될 때 한국의 새로운 미래가 출현하겠지. 그렇다면 개혁가는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의 조건을 바꾸는 데 더 부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게 돈이 많다면,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을 재정의하는 데 쓰겠다. 지금과 달리 행동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게끔 삶의 조건을 조정하는 데 쓰겠다. “자유란 흑이냐 백이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지를 내팽개치는 것이다.” (테오도어 S.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중략) 그렇다면 여론조사 대상이 되었을 때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선택지 중에서 후다닥 골라야 하나? 그렇지 않다. 왜 하필 선택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거다. 그 선택지 자체에 불순한 의도가 있거나 선택지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하면, 설문지를 태연하게 휴지통으로 보내버리는 거다. 이런 일은 선택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설문조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 무지막지한 평가 권력을 휘두를 때 부지불식간에 그 평가의 선택지에 갇힐 수 있다. “당신은 진짜 못생겼어요.” 이때 발끈하며, 당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보여주려 노심초사하면, 당신은 이미 주어진 선택지에 갇힌 것이다. 차라리 역으로 질문을 되던지는 거다. “잘생겼다는 게 뭔데?” “사람을 잘생겼냐, 못생겼냐로 딱 나눌 수 있나?” “나는 잘생긴 날도 있고 못생긴 날도 있는데?” “미적 기준은 시대별로, 사회별로 바뀐다던데?” “누가 너에게 나를 평가해도 된다고 하던?” 아도르노는 주어진 선택지나 이야기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편끼리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끼리끼리 모여 서로 ‘우쭈쭈’ 해주다 보면, 자기와 다른 모든 의견은 “성가신 저항, 사보타주,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갈 계략” 정도로 여겨지게 된다. 그 결과, “풍요로운 대조를 만들 능력, 모순을 감싸 안으면서 현재의 자신을 넘어설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패거리 의식은 심각한 자해행위다. 자기 심장에 박힌 치명적인 칼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시효가 다했다는 증거가 넘치는데도 여전히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미 도래한 지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제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도 있다. 세상을 보다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는 이름이 필요한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과거의 이름을 재정의하는 작업들도 포함된다. 여건이 성숙해갈 때 새로운 정의를 늦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것도 그 사회의 역량이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육신에게 영혼의 존엄은 좀처럼 깃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시들고,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도 시들고,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분발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토라지는 마음이 생긴다. 왜 이리 잘난, 아니 잘나 보이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지! 잘나 보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오늘도 하염없이 토라져간다. 이제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길어 올리는 일 대신, 남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면서 자기 존재의 위엄을 찾으려 드는 사회가 되어간다. 과로로 인한 번아웃의 공포가 드리운 사회에서는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다. 돈으로 편의를 사고, 돈으로 쾌감을 사고, 돈으로 학벌을 사고, 마침내 도덕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 제정신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간다. 돈이 없을 때 굴러떨어질 어두운 골짜기를 상상하며, 두둑한 잔고를 자랑스레 인증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그 인증에 환호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그 환호로 자존심을 높이는 사회가 되어간다. 잔고를 늘리는 데 실패한 다수는 자신이 두어간 인생의 악수들을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악수로 가득한 바둑판이지만, 바둑판을 엎고 게임의 룰을 다시 만들 배짱은 없다. 두둑해진 잔고를 털어 그럴듯한 아파트를 사게 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존재의 자갈밭을 터벅터벅 걷는다. 존엄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 경비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가짜 존엄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에게도 평화는 없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되고, 그 소중한 갑질도 이제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추모할 수 없다. 갑질을 못 이겨 경비원이 자살해도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까 봐 그 경비원을 추모할 수 없다. 추모 현수막을 걷어버려라!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놀라울 정도로 자식새끼 사랑은 여전히 강고하다. 자기 자식에게 험한 일을 면제해주려고 외국인 노동자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 사회가 되어간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수치심이 밀려든다. 영혼의 번아웃처럼 밀려든다. 분발할 체력이 고갈된 영혼은 이제 울고 싶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은 함부로 울지 않는 법, 사회에서 허용한 울 곳을 찾아 헤맨다. 장례식장에 가면, 자신의 수치심까지 담아 남들보다 더 크게 우는 사람이 있고, 대낮의 성당에 가면 어두운 구석에서 남들보다 더 깊이 흐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 뜬금없는 계엄 시도를 통해 공동체의 밥상을 엎은 지금, 한국의 보수 우익에게도 마침내 자살의 기회가 왔다. 어떤 마무리를 할 것인가. 국가 폭력의 기억을 가진 한국의 보수 우익은 과연 월트처럼 핏줄을 넘어, 인종 편견을 넘어, 구식 남성성성을 넘어 자신의 후계를 찾을 수 있을까. 반공과 시장에 대한 집착을 넘어 월트처럼 세대를 넘는 가치를 발견하고 전해줄 수 있을까.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중병에 걸린 자신을 버림으로써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국은 기후 위기로 인해 바다에 잠기거나 인구 감소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란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파국의 아이러니는 파국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온다는 데 있다. 아포칼립스 장르물에서 파국이 채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은 앞 다투어 먼저 죽는다. 파국을 예감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인간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인간보다 인간성이 먼저 죽는다. 친절을 버리고, 위선을 버리고, 염치를 버리고, 돌봄을 버리고, 연민을 버리고, 관용을 버리고, 예의를 버리고, 인권을 버리고, 끝내 지켜야 할 가치들을 쓰레기처럼 버린다. 바로 그렇게 삶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도 끝장날 수 있다.
스시101
4.0
곪아있는 염증 안쪽을 해부하는 문장 뒷편에 느껴지는 깊은 애정과 관심
김재박
3.5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사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여 재치있는 문장으로 시의적절한 주제를 던져준다. 단, 아마 칼럼 모음집이어서 인지 전체적인 유기성은 부족해 보인다.
박기원
3.0
크게 묻기만 하고, 답은 '아몰랑'. 한국정치사상사를 쓰고 싶어서 썼다기엔 얇고 빈약하다. 좋았던 챕터도 있지만 한결같이 결말이 '열린 결말'이다.
왓칭깔루아
4.0
#노비랜드 칼럼 인상적. #한강 소년이 온다, 비평 칼럼은 문학평론가들이 쓴 글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려는 힘(양심)에 대한 포착, 문학은 고발과 재현을 넘어 인간 심연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은 것처럼 인간은 싫지만 인간의 양심은 좋다. #그랜토리노 비평 인상적. 아름다운 보수는 언제쯤.
장현지
2.5
책의 모든것이 거창하다 고학력 중년남성의 에세이....아니 한겨레 칼럼모음집같다 상식의 독재란 책이랑 같이 읽고있어서 그런가 더 실망스럽다 (상식의 독재란 책은 나름 이론적 근거라든가 저자의 숙고의 흔적이 보인다) 그래도 내용이 쉬워서 술술 읽힌다 글구 재밌다
알량한
3.5
한국이 무엇인지 물으며 시작한 책은 고통을 잘 참으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한국은 고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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