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통설, 조선왕조의 ‘신흥 사대부’ 건국론에 도전한다
획기적인 연구이며…… 조선왕조의 본질과 기원에 관련된 기존의 여러 통설을
뒤집는 독창적이고 원숙한 업적이다.
- 제임스 B. 팔레, 워싱턴대 교수
“이 책의 통계적 증거는 조선전기 지배층의 구성에 관련된 이전의 견해가 틀렸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던컨은 지금까지 가장 풍부한 증거를 모았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교수
한국사의 최대 전환기였던 1392년의 ‘고려-조선왕조 교체’,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역사적 중요성이 전혀 없는 단순한 궁중반란인가? 아니면 신흥 사대부가 고려의 구세력을 축출하고 새 시대를 연 일대의 사회혁명인가? 조선왕조가 그 이전의 과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였음을 제목에서 암시하는 이 책의 주장은 무엇일까?
1966년 미군으로 한국에 와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한 뒤 고려대에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동안 한국을 바라본 친한파이자, 1989년부터 UCLA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까지 24명의 한국학 박사를 배출하며 현재 서구에서 한국 역사학을 이끄는 존 던컨 교수. 그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뿌리를 고려왕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조선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교체로 보지 않고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식해 온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이 책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핵심요지는 고려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고려의 중앙관료귀족이 지방의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한 기나긴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조선의 건국에 대해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 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한다.
저자는 40년 한국사 공부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다는 소식에 접하며 “한국사 통설인 신흥 사대부설에 정면 도전하는 연구로서, 다시 여말-선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켜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대해 더 좋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정치 엘리트집단은 뿌리가 같았을까?
현행 국사 교과서를 포함하여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도세력은 고려 말에 대두한 ‘신흥 사대부’였다. 이 새로운 엘리트집단은 지방의 중소지주였고, 향리 출신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관계에 진출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중앙의 문벌귀족이며, 불교를 신봉하던 종래의 엘리트집단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이 이질적인 집단이 구체제와는 다른 ‘새 시대, 새 질서’를 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은 한국사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이 통설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전기(10세기)에서 조선전기(16세기)에 이르는 거의 6백 년 동안 임명된 관료 약 5천 명의 성분을 조사했다. 관심의 초점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엘리트들과 고려시대의 엘리트집단 사이에 뚜렷한 단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1351년 공민왕 때 신흥 사대부가 중앙관계에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의 연구결과는 그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조선전기의 주요 양반가문으로 38집안을 지적하였는데, 그중 9집안만이 1351년 이후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 가문과 공민왕 이전에 약간 명의 관리를 배출한 7집안까지를 더한 16집안을 던컨 교수는 신흥 사대부로 일단 가정해 놓고 보다 정밀한 검토 작업을 꾀한다. 그 결과, 이 16집안조차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왕조 교체의 주역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려 말에 ‘신흥 사대부’ 같은 새로운 엘리트집단의 출현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후기 권문세족과 신흥 사대부가 서로 대립하였다든지 권문세족이 도당(都堂)의 핵심이었다는 견해에도 던컨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문이란 당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세력가 개인 또는 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세족(世族)은 전통 깊은 귀족으로서 그들이 다름 아닌 사대부였다. 고려 말의 정치현실을 보면, 세족이 중심을 이루는 도당이 세족의 일부 구성원을 권문이라 하여 공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의 한국사 통설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흔히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고려의 귀족이 대거 숙청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려 말의 유명한 귀족 가운데 조선왕조가 등장함으로써 몰락한 가문은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16세기경까지 관계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는 문반이며,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도 던컨은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초기의 재추(재신과 추신, 즉 고위 관료) 중에서 20%는 무반 출신이었고, 조선초기에도 음직(蔭職)은 여전히 출사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중소지주이자 향리 출신인 신흥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 호된 비판을 하는 저자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후손들이 조선전기 지배층의 주류였음을 실증해 내고 있다.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소위 신흥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역이 아니었다면, 과연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던컨 교수는 여말선초의 한국지성계가 기존연구에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복잡 다양하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11세기 말 12세기 초에는 경세와 고전 중심의 유학이 발전하였고,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된 뒤에는 상당 기간 동안 사장(詞章)을 숭상하는 풍조가 두드러졌다. 그렇지만 여러 학풍이 혼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고문학(古文學)은 김황원과 김부식이 대표하였으며, 12세기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에는 북송의 고문학자 소식의 인기가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고문학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이제현, 이곡, 이인복 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현은 고문학과 성리학에 모두 정통하였다.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이름난 김종직도 마찬가지였으며, 15세기 후반 한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고 한다. 불교와 고려후기 양반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사정은 조선전기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유명한 권근의 형도 승려였으며 조선의 왕실이 불교를 후원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한국사회가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 초기는 한당유학과 성리학이 공존하는 일종의 과도기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상사적인 변화에 있어서도 점진적이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 성리학이 왕조교체의 이념적 무기였고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는 주장이 철저히 검증 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고려-조선 왕조의 지적 전통이 복합적이었다는 던컨 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지배층의 교체도, 사상적 변화도 동반하지 않았다면, 왕조교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던컨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이 높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새 왕조 건국에 수반된 개혁의 본질을 근거로 하여 “조선의 건국은 지방자치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고려 전기의 노력이 거둔 궁극적인 열매”라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장기적 지속성’을 찾아내려는 던컨의 다각적인 노력은 실로 감탄할 만하다.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연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