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테리 이글턴 · 人文学
3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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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발터 벤야민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오마주”이다. 그러나 이 ‘오마주’는 벤야민에 대한 ‘해설’이나 ‘재정리’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벤야민의 텍스트를 이글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곧 벤야민의 언어와 이글턴 자신의 언어를 겹침으로써 제3의 언어를 생산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비평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17세기 영국 문학을 거쳐 브레히트, 루카치, 프랑크푸르트학파, 트로츠키, 바흐친 그리고 라캉과 데리다 등의 동시대 이론가들과 벤야민을 때로는 겹치고 때로는 대조시킴으로써 ‘혁명적 비평’의 새롭고 역동적인 방향을 그려내고 있다.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는 아카데미즘과 부르주아 비평을 넘어 벤야민을 다시 비워내고 재활성화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강력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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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일러두기 서문 1부 발터 벤야민 1장 바로크 알레고리 2장 아우라와 상품 3장 역사, 전통, 혁명 역사의 유곽을 벗어나 전통의 발굴현장으로 마르크스주의 내러티브에서 혁명의 계보로 스타일 2부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1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2장 레토릭의 작은 역사 3장 텍스트성에 대하여 4장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론 5장 카니발과 코미디: 바흐친과 브레히트 우울과 유머 사이 마르크스의 농담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잃은 것 6장 역사의 천사 발터 벤야민에게 바치는 오마주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오늘날,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벤야민의 반역사주의가 혁명적 비평을 재창안하는 데에서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을 되살려낼 것인가가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아카데미즘과 부르주아 비평이 이미 전유해버린 벤야민을 어떻게 다시 빼앗아올 것인가이다. 이 책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는 이에 대한 테리 이글턴식의 답변이다. 또한 1981년에 처음 나온(그리고 2009년에 다시 나온), 조금은 오래된 듯 보이는 이 책이 여전히 우리에게 긴급하고 불가피한 이유는 바로 이 질문들 때문이다. 역사주의에 맞서 역사적 유물론의 ‘지금이라는 시간’을 이글턴은 우선 1부에서 벤야민의 이론과 텍스트, 스타일 등을 다루면서 무엇보다도 이를 ‘역사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1장에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중심으로 17세기 영문학 비평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폭로하고 2장에서 『샤를 보들레르』를 중심으로 상품과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을 살펴본 후, 이글턴은 3장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란 진화론적 내러티브, ‘영원한 과거 이미지’의 역사주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역사 연속체-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를 폭파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이를 위해 이글턴이 주목하는 것이 벤야민의 ‘전통’이라는 개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역사가 지배계급의 동질적 시간인 반면에, 전통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것으로서 계급 역사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일련의 발작 내지 위기를 뜻한다. 따라서 전통이 물려주는 것은 ‘기념비’ 따위의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며, 과거를 발굴, 수호, 공략, 폐기, 재등록하는 계속된 실천 자체가 바로 전통이다. 벤야민의 이러한 ‘전통’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성좌’이다.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의 과제가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역사를 성좌 이미지로 재구축한다는 뜻이다. 벤야민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현재를 메시아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잔뜩 박혀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으로 구상”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속에서 “역사적 유물론자는 사건의 메시아적 중단을 뜻하는, 억압당한 과거를 위해 투쟁할 때 혁명 쪽에 승산이 있음을 뜻하는 기호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역사는 단순한 이론적 구축물이 아니라 정치적 구축물이며, 여기에는 막대한 해방적 이해관계가 수반된다. 이렇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을 재구성하면서 벤야민은 파시즘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의 계보를 내세운다. 파시즘이 역사를 자기의 이미지로 다시 씀으로써 역사를 근절시킨다면,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측면을 파고듦으로써 과거를 다시 쓰고 이로써 과거의 혁명적 유효성을 구제한다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미래를 현재가 따라가야 하는 유토피아적 모델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변혁이 스스로를 투영하는 공간, 그러한 투영에 의해서 생산되는 공간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사를 잠에서 깨우고 역사 연속체를 폭파시킬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충격의 순간을 우리가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1부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다루었다면, 2부에서 이글턴은 이러한 벤야민의 반역사주의를 동시대 비평의 다양한 조류들과 비교 및 대조함으로써 오늘날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잃어버린 역사적 유물론의 측면, 곧 ‘혁명적 비평’의 재창안을 위한 역동적이고 새로운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우선 1장에서 이글턴은 자신을 포함해 루카치, 아도르노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 비평, 특히 마르크스주의 미학사를 고쳐 쓰는데, 이는 곧 승리의 순간들이 아니라 결핍과 상처를 드러내는 괴로운 걸음들로 밝혀진다. 이글턴에 따르면 ‘혁명적 비평’의 문제는 부르주아 학계에 포섭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미 항상 부르주아 학계에 일부 포섭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원인이 있는데, 곧 대중 혁명 활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괴리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기획의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부르주아 쪽에 도움을 구했다는 것이 이글턴의 진단이다. 따라서 이글턴에게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문제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의 문제이다. 이어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의 일차적 과제가 무엇일지, ‘혁명적 문학비평’이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자고 제안하는데, 특히 이런 비평을 위한 패러다임을 페미니즘 비평의 성과와 한계를 통해 일별하고 있다. 이후 2장에서 4장에 걸쳐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기존의 아카데미 비평 사이에 어떤 논쟁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우선 2장에서는 레토릭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비평의 정치성을 논의하는데, 이를 통해 비정치적 비평의 겉모습을 폭로한다. 3장에서는 문학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논쟁을 바탕으로 텍스트의 ‘전통’을 재구성한다. 이글턴은 ‘문학’ 그 자체가 항상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이라고 말하며, 벤야민이 작품의 전유가 투쟁 과정임을 십분 인식하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즉, 텍스트 자체가 생산물을 가능한 한 역사의 손아귀로부터 뜯어내 전통이라는 매트릭스 속에 삽입해야 하는 전쟁터이며, 작품의 전유는 곧 작품 생산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작업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4장에서 이글턴은 해체론과 정면 대결하는데, 여기서 벤야민은 해체론이라는 오늘날의 비평적 실천을 예표하는 동시에 이후의 해체론의 한계들을 조명하는 준거로서 등장한다. 이글턴은 해체론이라는 일련의 텍스트 처리가 급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와 같은 통찰과 처리가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전유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즉 이글턴은 모든 것을 전복하되 아무것도 전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해체론의 궁극적 목표가 의미의 불확정성을 선언함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을 핑계를 얻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혁명적 비평의 재창안을 위하여 이 책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5장에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희극론을 정립한다는 야심찬 과제를 설정한다. 우선 이글턴은 ‘고전적 슬픔’이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팽배해 있으며, 이러한 우울이 주로 프롤레타리아의 패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이글턴은 벤야민의 성찰에서 이러한 괴로움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의 토성적 기질이 입심 좋은 역사주의적 신화들에 시한폭탄을 설치한다고 덧붙인다. 이번 경우에도 벤야민이 나쁜 쪽을 통해 전진하는 점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이러한 역설적 의의를 바흐친과 겹쳐놓는다. 물론 바흐친의 카니발과 벤야민의 울부짖는 고통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벤야민의 구원이 부정적 이미지에 머문다면, 바흐친의 유토피아는 실정적 생기로 넘쳐난다. 그럼에도 벤야민의 비극적 우울과 바흐친의 희극적 활기가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이글턴의 주장인데,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정치적 몸학’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연구의 시급한 요청이다. 이는 곧 역사적 육체의 정치적-리비도적 생산에 대한 연구로서, 이를 통해 정치적 육체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것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글턴은 바흐친의 정치적 몸학이 벤야민의 작업에서 묻혀 있는 것, 부정적인 양식으로 현존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바흐친적 카니발과 벤야민적 파국이 모종의 우회로를 거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5장의 후반부에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거쳐 브레히트 연극의 희극성을 논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희극적 전망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글턴은 벤야민을 비롯한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머로부터 그리 많은 것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안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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