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소설은 없다
1977년, 비운의 교통사고로 42세에 요절한 이휘소. 물리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비춰볼 때 이휘소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이휘소 박사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설을 통해서였다. 몇 편의 소설을 통해 알려진 이휘소 박사의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을 도와 우리나라의 핵개발에 앞장선 용감한 과학자이자 애국자이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활약을 통해 국내에 핵을 들여온다는 설정은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법정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이휘소의 이미지는 여전히 소설 속의 이미지이며, 이휘소를 다룬 서적들 역시 빈약하고 부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곁들여 만들어진다. 이런 류의 책에서 이휘소는 애국적인 과학자로, 효심 깊은 과학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휘소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에게 애국심이 있었건 효심이 깊었건 그렇지 않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 있는 것이다.
몇 편의 소설은 분명 이휘소 박사를 우리나라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실제의 이휘소가 아닌 가상의 이휘소로서의 명성은 불명예의 명성을 드높인 것이다. 이휘소의 유족과 지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소설 속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휘소는 이미 학문적 업적으로 세계적 명예를 얻었다.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닌 상상력이 발휘된 허구의 이미지는 그에게 오히려 흠만 될 뿐이다. 미화로 각색하고 허구를 덧칠하지 않아도 이휘소의 생애는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정확하고 방대한 조사를 통해 사실에 기초한 최초의 이휘소 평전을 저자 강주상이 썼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휘소가 강주상의 스토니브룩 물리학과 시절 박사 학위 논문의 지도 교수였다는 친분 외에도 같은 물리학자로서 이휘소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공정하고 객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이나 기록 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내를 오가며 이휘소의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하여 이 책을 써내려갔다. 상상을 배제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지인들의 논리적 증언을 토대로 논리적 연결을 통해 원고를 완성한 것이다.
이 책은 허구의 그늘에 가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이휘소의 학자로서의 업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이론은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어렵지만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휘소의 성장기와 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는 과정을 함께 담아 인간 이휘소의 면모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으로 혈혈단신 미국 땅으로 날아가 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소문과 억측들
굳이 반박해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것이긴 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에 이휘소 박사가 깊숙이 관여한 중심인물이었다는 오해는 이 책이 만들어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 없다면 소설들의 내용이 정설로 굳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로 믿어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소립자 물리학자이다. 소립자물리학은 원자핵보다 작은 우주의 기본 입자들 간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서 핵무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휘소 스스로 증오하던 박정희 정권을 위해 일을 했을리도 없고 그의 죽음 역시 의문사로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자는 이 외에도 이휘소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정황과 증거들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한다.
이휘소는 사실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에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이것이 진실이며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